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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목숨보다 소중했던 처녀성(處女性)에 얽힌 사연

2015-06-21 조선족 대표위챗 潮歌网




누군가 처녀 운운하면 “지금이 조선시대냐?”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랬다. 조선시대엔 처녀성을 지키는 게 목숨만큼 중요했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한 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처녀성 검사를 실시하려다 맹렬한 비판을 받고 철회했다. 이번 사태의 영향 때문인지 인도네시아 정부는 여성이 경찰이나 군에 입대하기 위해 받던 처녀성 검사를 폐지한다고 밝혔는데, 그동안 인도네시아 경찰은 ‘경찰후보자 신체검사 지침’에 따라 여의사가 손가락 두 개를 후보자 성기에 집어넣어 처녀성 유무를 검사해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엔 유교적 인식에 따라 순결과 정조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으며, 첫날밤에 혈흔이 없으면 파혼을 당하기도 했다. 붉은 피를 본다는 뜻인 ‘견홍(見紅)’을 하지 못한 신랑 측의 파혼이 부당하다며 상소를 올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사실 처녀막은 매우 얇은 막에 불과해 가벼운 낙상만으로도 쉽게 파열된다. 하지만 과거에는 의학 지식이 일천하고, 정조관은 엄격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생리주기에 혼사 날을 잡거나 그도 안 되면 허벅지를 뾰쪽한 도구로 찔러 일부러 생채기를 내 이부자리에 피를 남겼다고 한다.

첫날밤 피를 흘리지 못하면 소박맞던 신부들

여성들의 눈물겨운 처녀 증명(?)에 맞서 간통조사법은 날로 잔혹해졌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감당송(甘棠訟)’이라는 간통조사법이 나온다. 시집갈 날을 받은 처녀를 두고 동네 총각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보로 자신과 배를 맞추었다고 소문을 내면 시댁에서 관아에 이를 조사해 달라고 송사를 냈다.

그러면 사당이나 으슥한 나무 아래에서 팔뚝과 허벅지를 걷어 보이는 것이 법도였다. 악독한 관원들 중에는 여종을 시켜 처녀의 속곳을 들추게 해 허벅지의 멍이나 음모까지 살폈다. 경험이 있는 여성은 관계 시 격렬한 마찰로 허벅지에 파란 멍이 생기고 음모가 검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처녀성과 정조를 중시한 탓에 웃지 못할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노처녀를 신부로 얻은 신랑이 아내와 첫날밤을 치른 후에 “숲이 깊고 속이 넓으니 반드시 딴 사람이 지나간 자취로다”라고 탄식했다. 그러자 신부가 “뒷동산의 밤송이는 익으면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라도다”라고 대꾸했다는 얘기가 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여성의 정조를 억압적으로 강요했다. 18세의 청상과부 어우 양은 바늘로 자기 이마에 ‘수절맹세’라는 글자를 새긴 뒤 까맣게 먹물을 들였다. 그래서 그녀는 ‘검은 머리 열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19세에 과부가 된 펑 씨는 주위 사람들이 수절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느냐고 겁을 주자 팔뚝의 살점을 이로 잘라내 못 위에 갖다 걸었다. 살점은 그녀가 늙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순결한 처녀는 신이 버린 여자’라고 멸시한 서양의 성 풍속

처녀성을 중시했던 유교문화권과 달리 서양에서는 ‘순결한 처녀는 신이 버린 여자’라는 말로 멸시했다. 결혼 적령기까지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또한 처녀막이 터지면서 쏟아지는 피에 경험이 부족한 신랑의 음경이 닿으면 발기불능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페니키아인들은 딸의 혼인 날짜를 앞두고 하인에게 ‘파과(破瓜)의식’을 치르도록 했다. 파과의식은 처녀막을 깨뜨리는 행위다. 그리스인들은 사제(司祭)가 신전(神殿)에서 상아나 돌로 만든 인조 남근으로 파과의식을 치러줬다. 사제에게 처녀혈의 사악함을 막아주는 힘이 있다고 믿는 캄포디아에서는 최근까지도 승려들이 파과의식을 관장해왔다.

파과의식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존재했던 풍속이며, 매춘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의 사학자 헤로도토스가 바빌론 신전에 대해 언급한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은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신전에 간다. 그곳에 앉아서 자신의 몸을 낯선 남자와 교합하고, 그녀의 치마 위에 은전을 던져준 사내와 함께 돌아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으로 갈 수 없었다.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성은 아주 빨리 임무를 완성했지만 추한 여성은 3~4년을 기다리기도 했다.’ 헤로도토스는 바빌로니아 여성들이 일생에 단 한 번 처녀 때 여신 미리타의 신전에서 외도를 했으며, 이는 결혼하면 평생 한 남자에게 독점당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주장했다. 여신 앞에서 처녀성을 바치는 이 종교의식을 ‘성스러운 기녀(Sacred Prostitute)’들이 전담하게 되면서 매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순결한 처녀를 가까이 하면 회춘한다?

처녀성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겼던 유럽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소녀 매춘이 만연해졌고, 처녀 교제가 모든 남성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순결한 처녀를 가까이 하면 회춘한다는 학설이 신봉돼 사양길에 접어든 노인들에게는 천금이 아깝지 않을 외도가 처녀 교제였다.

런던에서 당시 유행했던 ‘숫처녀 고가 매입’이란 공개 매춘의 실상을 작가 이반 블로프는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런던에서는 처녀 능욕을 극히 당연한 것으로 일삼고 있는 밀매음 조직이 성행하고 있다. 이들 처녀의 대부분은 어린 소녀였으므로 자신들의 의사와는 달리 희생되고 있다. 이런 폭행이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거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런 범죄가 어느만큼 쉽게 실시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다.’

이른바 동녀(소녀) 선호는 우리나라에도 성행했다. 노인들의 성적 노리개 역할을 했던 소녀를 ‘웃방애기’라고 불렀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어린 소녀나 처녀와 관계를 갖는 건 아무런 약효가 없다. 오히려 복상사와 같은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위험이 높다. 일부 몰지각한 회춘론자들이 의학적 근거로 들고 있는 <소녀경> 같은 성의학서의 ‘동녀유감론’에도 어린 소녀를 가까이 하되 성교는 갖지 말라고 분명히 기록돼 있다. 따라서 발기부전이나 성욕 감퇴와 같은 노화 증세가 나타난다면 약효도 없고 윤리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영계섹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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