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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산"40돐특집] 불가능은 가능으로, 화는 복으로 (남영전)

남영전 潮歌网 2020-09-15

대형문학지 《장백산》창간 40돐 기념나와 《장백산》


불가능은 가능으로, 화는 복으로

- 《장백산》 창간 40돐을 맞이하여


남영전



40년 전의 5월, 문학의 황무지인 황성 옛터 통화지구에서 우리말 대형문학지 《장백산》이 고고성을 울렸다.

잡지 출간을 간절히 고대하던 통화지구의 작자들은 격동의 눈물을 흘렸고 독자들은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지구 외의 작자와 독자들의 경탄과 축하의 메시지가 봄꽃처럼 날려왔었다.

환호 속에서 나는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왜서인가? 사실 우리는 큰 모험을 했기 때문이다.

잡지를 출간하자면 반드시 잡지출간단위, 전문편집일군, 경비와 잡지등록번호 등 4가지 조건이 겸비되여야 한다. 

하지만 《장백산》은 그냥 통화지구 문련에 출판단위 이름을 걸어놓고 전문편집은 아예 생각도 못하는 일이였다. 게다가 경비란 통화지구 통전부로부터 얻어온 달랑 2천원 밖에 없었고 잡지등록번호는 한어문판 《장백산》의 조선어문판이란 구실을 달았다.

4가지 필수조건 가운데 한가지도 구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불쑥 잡지를 펴냈으니 어찌 큰 모험이 아니였겠는가!

《장백산》의 운명은 허공에 떠있는 한송이 구름과도 같았다. 어느 때든 바람에 날려가면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신세였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었으랴!

하지만 이미 벌여놓은 일이니 도망갈 수도 없었고 후퇴할 수도 없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잡지의 영향력으로 사회의 인정과 지지를 받아 부족한 조건을 하나하나 갖추어가는 길이였다.

목표가 뚜렷했기에 5명의 업여편집은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1980년 5월에 창간호를 발행하고 그해 가을, 휘남현 조양진 조선족소학교 로동억 교장님의 성원으로 학교에서 꾸리는 인쇄공장에서 《장백산》 2기를 무료로 인쇄하였다.

《장백산》이 호평을 받았기에 통화지구 문련의 한족분들도 기분이 좋아 1981년부터 해마다 우리들에게 5천원 잡지 출간 경비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하여 우리는 매년 7천원으로 계간을 만들게 되였다.

5명의 업여편집들로 일년에 대형잡지 2기를 펴내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이제 4기를 펴낸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였다. 하지만 누구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의 분투정신은 늘 나를 감동시켰다.

원고 복심, 주류문단의 우수작품 선정과 번역 담당인 김택원 선생은 집안현조선족문화관의 업무골간이였는데 그 당시 그에게 두가지 좋은 기회가 차례져있었다. 바로 로임 한급 오르는 기회와 새집을 분양받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이 기회를 동료들에게 양보했고 대신 동료들은 그가 하는 편집 일에 최대한 편리를 도모해주었다.

산문, 수필, 실화문학, 민간문학, 평론 등 여러 장르의 담당인 김수영 선생은 일찍 1960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나와 통화조중 고중부의 조선어문 교원으로 있었다. 사실 그는 김택원 선생과 나의 선생님 되는 분이며 나와 김택원 선생의 든든한 뒤심이였다. 그때 김수영 선생은 고중부 어문교연조의 책임자였고 고중생들의 대학입시 때문에 항상 바삐 보내야 했기에 원고 편집은 언제나 밤시간에 완성해야 했다. 김수영 선생 댁은 다섯식솔에 단칸방이였기에 밤마다 주방의 불을 밝게 켜놓고 부뚜막을 책상 삼아 쪽걸상에 앉아서 자정이 넘도록 원고를 편집해야 했다. 

소설편집인 한정길 선생은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류하진 조선족소학교의 조선어문 교원이였는데 역시 단칸방에 다섯식솔이여서 원고 편집은 강의 외 시간을 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수업만 끝나면 소설원고를 붙들고 있었기에 다른 선생들의 불만을 다소 자아내기도 했으나 그의 어문강의는 언제나 참관수업 대상으로 지목받아 누구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가편집인 마송학 선생은 60년대 연변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매하구`11중의 조선어문 교원으로 있었는데 그 역시 골간으로서 낮시간은 어찌할 수 없고 밤에 원고를 편집했는데 다행히 세식솔에 방이 두개여서 좀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원고 기획, 원고 청탁, 원고 종심 담당이였다. 원고 종심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인지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류하현위 선전부 신문보도조의 조장으로 있었는데 신문보도조는 이름 그대로 현의 선진 경험과 사적들을 즉시 《길림일보》와 길림인민방송국에 홍보하는 일로 현의 령도들이 눈여겨보는 부서였기에 항상 압력이 있는 직무였다. 또한 신문보도를 중요시하는 현위서기는 우리들에게 기사감을 제공하기 위해 농촌 공사 현지지도를 나갈 때면 늘 나를 데리고 다녔다. 또한 그의 연설문을 작성하는 작업도 항상 나의 몫이였기에 밤 10시까지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나에게는 다반사였다. 게다가 《장백산》의 일까지 하다 보니 공휴일은 물론 밤 12시 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1981년 가을, 통화지구 문련 비서장인 김내상 선생이 류하에 왔다가 우리의 상황을 알고는 혀를 내두르며 인차 문련 지도자들과 검토를 거친 결과 한어문판 《장백산》의 10명 편제에서 남아있는 2명의 편제를 조선어문판 《장백산》에 돌리기로 했다. 하며 그해 10월, 나와 김택원 선생이 조선어문판 《장백산》 전업편집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그때 김택원 선생은 집안에서, 나는 류하에서 각기 원고를 심사하고 필요 시에 통화지구 문련에 모여 업무를 보았다. 고마운 것은 김수영 선생님, 마송학 선생님, 한정길 선생님 세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를 협조해주었다.

 1982년 봄, 《장백산》이 세번째 봄을 맞을 때 우리는 뜻밖의 일로 눈앞이 캄캄하였다.

통화지구 문련의 인사변동과 한어문판 《장백산》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듬해부터는 매년 5천원의 출간비용 지원을 종결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되면 통화지구 통전부의 2천원으로는 잡지를 만들 수 없었다. 처음부터 모험한 일이라 이제 그 쓴맛을 보게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장백산》의 애독자였던 장춘재정학원 공회주석 황현걸 선생의 덕분으로 길림성 재정청 감찰처장 전용일 선생을 알게 된 것이다. 전용일 처장은 말수는 적어도 마음은 뜨거운 사람이였다. 그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로 1983년 1월부터 《장백산》은 매년 성재정에서 3만원의 출간비용을 지원받게 되였다. 그 시기 3만원이란 아주 큰돈이였다. 특대 희소식! 통화지구 문련, 통화지구 재정국에서 모두 경탄해마지 않았다. 

매년 3만원의 고정경비가 있었기에 그해 여름에는 7명의 편제를 가진 《장백산》 편집부를 내오게 되였다.

《장백산》 편집부가 설립된 다음 시급한 문제는 직원들의 주택문제였다.

때마침 길림성 림업청의 김영준 부청장이 길림성민위 주임으로 부임된 것이다. 김영준 주임은 해방 전에 혁명에 참가한 로간부로서 민족사업을 아주 중시하는 분이였다. 그의 지지와 관심으로 이듬해 길림성민위로부터 주택 지원금 6만원이 조달되였다.

이리하여 1984년에 《장백산》 창간 원로 통화조중 조선어문 교원인 김수영 선생이 산문, 수필, 실화, 평론 담당 편집으로;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혼강시 외사판공실에서 통역으로 활약하면서 소설 창작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대외 련락에 매력을 가진 청년 소설가 리여천 선생이 소설 담당 편집으로; 시 탐구에 관심 있고 낡은 시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실력 시인 김정호를 시 담당 집으로 하여 《장백산》은 온전한 편집진을 가지게 되였고 김택원, 리여천 그리고 내가 각기 집안, 혼강, 류하에서 통화시로 이사를 하게 되였다.

1985년부터 《장백산》은 격월간으로 변경되였다.

4년 남짓 간고분투하고 귀인들의 지지로 항상 페간의 위험을 안고 불안했던 《장백산》은 이제 4무四无에서 4유四有를 창조하여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은 것이다. 꿈 같던 일이 모두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1985년 5월, 《장백산》 창간 5주년 좌담회를 열어 새로운 출발을 시도할 때였다. 또 예상치 못했던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통화지구 지역개혁으로 원래의 통화지구 행정구역이 통화시, 혼강시, 매하구시로 나뉘여지면서 《장백산》이 재정상 부담이 된다는 리유로 어느 시에서도 받아주려고 하지 않아 잡지 주관단위가 없어진 것이다. 또 막막한 처지였다.

그때, 통화지구 류희림 서기가 중앙당교의 학습을 마치고 댁에서 휴식 중이였는데 곧 길림성 부성장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우리는 체면을 무릅쓰고 그의 댁을 찾아갔다. 류희림 서기와 우리는 워낙 인연이 있는 사이였다. 우리는 류희림 서기를 만나서 류서기님은 곧 성소재지로 승급을 하지만 우리는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였다고 이실직고하자 그는 서슴없이 자기와 같이 장춘에 가자고 하였다.

그는 이번 중앙당교 학습 기회에 길림성작가협회 비서장인 류봉의와 동창이 되여 친숙해졌다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줄 테니 《장백산》을 길림성작가협회에 소속시키라고 하였다.

그 시기 길림성작가협회 주석인 호소 시인도 우리와 우정이 깊은 관계였다.

1985년 7월 30일, 길림성위 선전부의 문건이 하달되였다. 《장백산》을 길림성 작가협회에 소속시키되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 협조한다는 내용이였다.

이리하여 위기에 처한 《장백산》이 지구급 잡지로부터 성급 잡지로 승격하였다. 또 화가 복을 가져다준 셈이다.

1987년 가을 전국 간행물 정돈 때, 《장백산》은 또 한번 칼도마에 올랐다. 이번에는 더더욱 심각한 위기였다.

중앙판공청 15호 문건이 내려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 성급 단위에서 간행물을 두개까지 보류할 수 있으나 셋 이상이면 정돈해야 한다.  

잡지 주관단위와 편집부는 한 도시에 있어야 하되 그렇지 않은 경우 편집부를 잡지 주관단위가 있는 곳으로 옮기든지 아니면 편집부관할권을 지방에 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간행물은 정돈해야 한다. 

그 당시 길림성작가협회에 귀속된 간행물로는 《작가》, 《시인》 잡지가 있었고 《장백산》은 후에 끼여든 잡지였다.

문건 요구에 따라 길림성작가협회는 《장백산》을 살리기 위해 잡지를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 소속시키고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길 것을 성위 선전부에 건의하였다.

그 당시 성위 선전부에 새로 부임한 부부장이 간행물 정돈의 총책임자였는데 그는 길림성작가협회의 건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는 문학잡지를 출간하는 기관이 아니다. 전국적으로도 이러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또 한 기층단위를 통채로 성소재지로 옮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장백산》은 페간대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이 주관 부부장의 결론이였다.

《장백산》 생사의 관건 시기에 좋은 일이 생겼다.

조선문예출판사의 초청으로 6명으로 구성된 《장백산》잡지사대표단이 15일간 조선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대표단 단장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김영준이였다.

《장백산》잡지사대표단은 조선측의 열정적이고 격 높은 환영과 접대를 받았다. 벤츠승용차 3대가 대표단의 전용차량이였고 각종 참관과 교류 활동은 모두 원만히 진행되였다.

방문결속일을 며칠 앞두고 김일성 주석님께서 대표단 일행 매개인에게 주는 선물을 조선외무상이 정중히 전달하였고 조선정무원 문화교육 담당 정준기 부총리가 만수대의사당에서 45분 동안 대표단 일행을 접견하였다. 이에 관한 소식이 《로동신문》에도 실렸다.

대표단 일행이 장춘기차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성위 선전부 류수범 부장이 영접해주었고 성위 왕충우 부서기가 사무실에서 대표단 일행을 접견하였다.

《장백산》대표단의 조선에 대한 성공적 방문은 잡지사가 길림성민위에 소속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하였다.

1988년 1월, 성위 선전부 7호 문건이 내려왔다. 간행물 정돈에서 《장백산》은 1988년부터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 소속되고 길림성작가협회에서 협조한다는 내용이였다.

이로 하여 《장백산》은 1988년부터 매년 길림성민위의 보조금 10만원을 받게 되였다.

잡사사의 어렵던 소속문제가 해결되였으니 이제 남은 과제는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기는 일이였다. 이 일 역시 난관에 부딪쳤다.

그 당시 길림성민위에는 4명의 부주임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장백산》이 길림성민위에 소속되는 게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리유인즉 역시 민족사무위원회는 기관으로서 문학지를 출간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영준 주임과 성위 선전부의 리립후 처장이 애쓴 덕에 끝내는  《장백산》이 장춘으로 옮겨오게 되였다.

1990년 4월 30일, 길림성민위는 성정부에 보고를 올렸다. 성위 선전부, 길림성신문출판국, 길림성작가협회의 공동협상으로 《장백산》잡지사의 장춘으로의 이전을 동의한다는 내용이였다.

그 시기 길림성신문출판국 허화응 국장이 길림성정부의 비서장이였고 길림성정부의 관할 령도는 리덕수 부성장이였기에 보고는 신속히 처리되였다.

5월 11일, 《장백산》잡지사 장춘 이전을 비준하는 길림성인민정부(1990) 44호 문건이 내려왔다. 《장백산》 창간 10주년에 《장백산》에 주는 기념비적인 선물이였다.

이로써 《장백산》은 중요한 과제 하나만 남았다.

10년 동안 《장백산》은 줄곧 여기저기서 경비를 얻어쓰는 신세여서 돈이 좀 많이 생기면 살림살이가 편안하고 그렇지 못하면 늘 쪼들리는 살림이였다. 때문에 길림성재정청의 전액지원 사업단위가 되는 것이 우리의 희망사항이였다. 한개 기층단위가 길림성 재정청의 전액지원 직속단위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길림성민위 김영준 주임은 이 일을 전적으로 지지 성원해주었고 경제처 주윤정 처장 또한 발벗고 나섰다. 그리하여 1991년 1월부터 《장백산》은 길림성재정청의 전액지원 직속 사업단위로 되였다.

험난한 《장백산》 창간의 길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꿈만 같다.

상상할 수 없는 모험의 시작,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후에는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불가능은 가능으로, 화는 복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에는 《장백산》 임직원들의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작가들의 좋은 작품으로 《장백산》의 존재가치를 사회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위기를 맞거나 불화가 떨어졌을 때 귀인이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주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10년 동안 《장백산》에는 박선석의 <술고래 남편>, <웃는 얼굴>, 리원길의 <숫불은 타오른다>, 정창호의 <돼지백정의 련애담> 등 소설과 김운룡의 <리홍광의 이야기>, <폭파영웅 조성두> 등 항일전쟁이야기가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고 리성태, 박상춘, 강동철, 최간식, 성진숙의 산문과 수필; 마송학, 김룡칠, 리성호, 류시홍, 김정호 등 시인들의 시작품들로 잡지는 지방특색이 짙었다. 그 시기 김철, 김성휘, 임효원, 조룡남, 리상각, 김태갑, 리삼월, 한춘, 정철, 박화, 문창남, 고신일, 남주길, 한창희, 한창선, 송정환 등 작가들의 작품들이 《장백산》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그 시기 《장백산》은 줄곧 료녕일보사 인쇄공장에서 인쇄하였다. 매기의 원고 발송과 잡지 발행 때면 심양으로 오가야 했다. 번마다 료녕신문사의 김운, 유흥준, 허대성, 장옥순, 계광현, 김광명 선생, 료녕민족출판사의 리창인, 김재현, 정철, 김창대, 박화, 홍순갑, 한창선 선생 등 여러분들이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10여년 동안 어려움 속에서 맺어진 정, 영원히 깊은 기억으로 남는다.

이제 장춘에 자리잡은 《장백산》, 목표는 무엇인가? 잡지 질의 향상이 우리의 제2의 목표였다.

1991년 음력설 후, 《천지》 부주필 김호근 선생이 장춘 누님집에 오면서 정세봉의 중편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 원고를 들고 와서 《장백산》에 발표할 수 있는지 검토를 부탁해왔다.

단숨에 읽어보니 보기 드문 좋은 작품이였다. 그 시기 주류문단은 일찍 마원马原의 <말몰이군牧马人>, 장현량张贤亮의 <남자의 절반은 녀자男人的一半是女人>, 류심무刘心武의 <반주임班主任> 등 사상해방 작품이 많이 발표되였는데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우리 문단에서 보다 일찍 발표된 사상해방 작품이다. 

이 소설이 그해 《장백산》 2기 톱으로 발표되였다. 잡지가 발행된 후 생각 밖에 한 독자의 편지가 날아왔다.

“《장백산》의 주필이 지주의 아들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가.”고 질타하는 내용이였다.

똑같은 내용의 편지가 길림성민위에도 보내졌다. 하지만 아무런 답장이 없으니 이번에는 성위 담당 서기 앞으로 고발장이 올라갔다.

“반당 반사회주의 경향이 있는 작품이기에 엄중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길림성신문출판국에서는 한족 출신인 조선족문학 전문가 두분에게 심사를 위탁했고 두 심독원의 결론은 일치하였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고 예술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90년대에 최홍일의 《눈물 젖은 두만강》, 허련순의 《뻐꾸기는 울어도》, 박선석의 《쓴웃음》 등 장편소설 련재는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1995년 6월 27일, 《장백산》의 김택원 선생이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타계하였다. 정말로 청천벽력이였다!

김택원 선생은 《장백산》 창간 원로의 한사람으로 16년 동안 《장백산》을 위해 최선을 다한 큰 공로자이다. 그는 언제나 편집일에 막힘이 없고 일을 빨리 할 뿐더러 재치 있게 하는 스타일이였다. 특히 주류문단의 우수작을 선정하고 번역하는 데는 청산류수여서 늘쌍 우리들의 감탄을 자아내였다.

언젠가 《천지》의 리상각 주필이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장백산》은 어쩌면 번역감을 그렇게 묘하게 잡소?”

“편집부의 김택원 선생이 귀신입니다”라고 내가 답했다.

떠난 사람을 기리여 그의 정신을 본받아 《장백산》을 잘 만드는 것이 선생에 대한 위안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나마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선생의 맏딸 김청화가 그의 뒤를 이은 것이다. 중문학부 본과를 졸업한 김청화 선생은 애초에 우리말이 서툴렀지만 열심히 노력한 결과 조선문 타자를 할 수 있게 되여 《장백산》의 원고 타자 문제가 해결되였고 출납까지 담당했기에 잡지사의 한몫을 막아주었다.

90년대, 《장백산》에 발표된 김학철 선생의 수필과 정판룡 선생의 장편실화 《고향 떠나 50년》은 인기작이였다.

김학철 선생의 더욱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위하여 90년대 후반에는 ‘김학철초대석’코너를 개설하여 한기에 3편 이상의 수필, 도합 60편의 수필이 발표되였다.

정판룡 선생은 투병중에도 20만자 되는 25명의 <작가일화>를 《장백산》에 련재하였다. 모두 소중한 자료들이다.

그 시기 리춘일 선생의 장편현장수필 <장강탐험>은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왔고 양은희, 남복실의 수필은 그 장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였으므로 녀성작가들의 수필 창작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1998년 년말, 그동안 밀렸던 ‘장백산문학상’ 시상식이 장춘에서 진행되였다. 김학철, 정판룡, 김철 선생 등 40여명의 수상자들이 장춘에 모였고 길림성인대 리정문 주임, 성정협 류희림 주석과 길림성민위 김영준 주임이 시상식에 참석하여 축하연설을 하였다.

새천년에는 《장백산》 창간 20돐을 맞아 광주모드모아그룹 리성일 리사장의 후원으로 장춘샹그릴라호텔에서 기념회가 있었는데 리정문 주임, 류희림 주석, 김영준 주임이 참석하여 축하연설을 하였다. 특히 그때, 투병중인 정판룡 선생님이 불편한 몸인데도 행사에 참석하여 축하연설을 해주셔서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2001년 4월, 설봉 선생의 후원으로 북경 전국정치협상회 회의실에서 ‘장백산작가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조남기 부주석이 회의에 참석하여 수상자 김학철 선생과 정판룡 선생께 상금과 기념품을 증정했다.

그해 김학철 선생은 9월 25일, 정판룡 선생은 10월 7일 선후로 별세하셨다. 우리 문단의 두 정상이 떠나셨다.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작품은 우리들의 보귀한 정신유산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1990년, 《장백산》이 장춘에 옮겨온 다음 장춘 각계 인사들의 따뜻한 관심과 지지를 받은 일들은 영영 잊을 수 없다.

1993년, 리정문 주임이 길림성인대에 승진하여 초기에는 청화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장춘의 각계 인사들은 그가 고생하고 있다면서 일요일이면 늘쌍 그를 초대하였는데 리주임은 종종 나를 불러주었으며 《장백산》이 장춘에서 발을 붙이려면 많은 사람들을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였다.

《장백산》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리주임은 꼭꼭 참석하여 고무를 해주었다. 한번은 그가 된감기로 출근도 못하고 집에서 휴식하고 있었지만도 우리의 중요한 행사에 나타나 큰 감동을 주었다.

광주모드모아그룹 리성일 리사장은 2000년에 《장백산》과 계약을 맺고 ‘장백산모드모아문학상’을 설립하였다. 8년 동안 그는 자신의 회사와 관계 회사의 힘을 모아 도합 50여만원을 지원하여 수상자의 작품집 40여권을 펴낼 수 있었다. 

2005년 4월부터 내가 《길림신문》의 직무까지 겸한 시기는 특수한 시기이다.

신문사의 일에 급급하다 보니 《장백산》의 일은 모두 부사장, 부주필인 리여천 선생이 담당하게 되였다.

그 시기 《장백산》 식구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들은 신문사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주어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였다.

그리고 리여천 부주필은 또 신문부간 일을 도왔고 김수영 선생은 《중한우호전기인물 한성호》를 신문에 련재하여 신문의 품위를 제고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 시기 중앙민족대학 석사 졸업생 안미영 선생이 《장백산》에 입사하여 편집부가 새로운 활력소를 갖게 되였다.

2010년 3월, 2년 초과봉사한 나는 퇴직을 하였다. 후임들이 내가 있을 때보다 더 잘 만드는 《장백산》을 보면서 《장백산》은 희망이 있다는 위안을 받는다.

《장백산》의 40년, 4명의 퇴직인원이 나왔다. 29세의 젊은 혈기에 《장백산》에 들어온 리여천 선생도 벌써 4년 전에 퇴직을 하였으니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리여천 선생, 김수영 선생 모두 《장백산》을 일떠세운 공로자이다.

1984년부터 《장백산》의 재미있는 소설은 모두 리여천 선생의 손을 거쳐서 발표되였다. 그가 알심들여 기획한 박선석, 림원춘, 강효근, 최홍일, 허련순, 리혜선, 우광훈, 김혁, 김남현, 김금희 등의 소설작품과 김병민, 리혜선, 김혁의 장편실화, 인물평전은 모두 우리 문단의 귀중한 정신재부이다.

지난날, 《장백산》은 각종 행사가 많았는데 외사 출신이고 조직능력이 강한 리여천 선생은 행사 때마다 주력이였다.

1984년 200여명이 참석한 《민족문학》 전국소수민족작가 통화문필회, 1988년 200여명이 참석한 《민족문학》 전국소수민족작가 연길장백산문필회, 2004년 200여명이 참석한 중국작가협회 제4차 소수민족번역회의는 모두 《장백산》의 큰 행사였는데 회의 안배, 접대 등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리여천 선생이 주력이 되였기에 이 세차례의 대형 행사들을 모두 원만히 거행하여 회의측에서 만족해했고 참가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 세월 《장백산》 자체의 각종 행사도 많았다.

1992년 장백산잡지사대표단 제2차 조선방문, 1998년 장백산문학상 시상식, 2000년 《장백산》 창간 20주년 기념회, 2001년 북경 ‘장백산작가상’ 시상식 등 행사 때마다 리여천 선생의 수고가 많았다. 행사 기간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휴식도 못하면서 이리 달리고 저리 뛰였기에 모든 행사가 다 원만히 진행되였다. 32년 동안 그는 《장백산》을 위하여 청춘을 다 바쳤다.

김수영 선생은 1937년 출생으로 우리 문단의 제1세대 작가이다.

업여편집 시기 김택원 선생과 내가 선생의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서너사람이 둘러앉으니 작은 단칸방이 꽉 차는 것을 보면서 내가 물었다. 이런 방에서 어떻게 편고를 하는가고? 그러자 사모님이 밤마다 주방 부뚜막 편고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일은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큰 충격이였다.

1985년, 《장백산》은 신인 양성을 목적으로 ‘장백산 문학창작 통신수업반’을 꾸렸는데 선생이 담임이였다. 300여명 학생이 ‘장백산 문학창작 통신수업반’에 참가했으며 그들 중 많은 분들은 나중 우리 문단의 골간이 되였다.

중한수교 후, 김수영 선생이 연길에 출장갔을 때 정판룡 교수는 김선생께 한가지 고민을 털어놓았다. 《금오》 잡지에서 한국 전북 태생인 정판룡 선생에게 회고록을 써달라는 청탁이 왔는데 어쩌면 좋겠는가 하는 것이였다.

김선생은 《장백산》에 먼저 련재한 다음 《금오》에서 전재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회고록은 교수님이 지나간 일들을 구수하게 엮으면 되니까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하였다. 후에 정판룡 교수는 나는 원래 작가가 아닌데 《장백산》이 나를 작가로 만들어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6년, 김선생이 서울에 가서 한달 동안 취재하고 돌아와 3개월 간 집필한 장편인물전기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는 신봉철 청장의 후원으로 두차례를 걸쳐 모두 4000부를 발행한 인기작으로, 그 당시 《장백산》과 《길림신문》을 크게 빛내였다.

김수영 선생은 1997년에 정년퇴직이지만 《장백산》에 일손이 부족하여 계속 발이 묶여 10년 동안 더 수고를 했다. 때로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 무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의 헌신정신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사적인 얘기지만 리여천 선생과 김수영 선생은 다년간 나의 토템시 창작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성원하였다. 2013년, 리여천 선생은 중앙민족대학 오상순 교수와 합작하여 장춘에서 토템시 세미나를 열었고 김수영 선생은 2015년, 장춘애청애독자클럽에서 토템시 랑송 경연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2016년, 내가 병으로 두차례 입원했을 때 번마다 병실에서 눈을 떠보면 침대 옆에 리여천 선생이 나를 지키고 있어 큰 감동을 받았다. 김수영 선생은 나보다 11세 년상인데 그가 병문안을 올 때면 나는 감격에 앞서 부끄러웠다. 한참 년하인 사람이 이게 무슨 꼴인가고.

2000년부터 《장백산》의 재무 담당인 강명옥 선생은 행정간부 출신으로 사교능력이 좋았다. 매년 년말 때면 그녀는 길림성재정청의 림시보조금을 성공적으로 신청하여 편집부에 큰힘을 보태였다. 건강상 원인으로 아쉽게도 2009년에 조기퇴직을 하였다.

2016년 봄, 리여천 주필도 퇴직을 하였다. 이로 하여 《장백산》의 30, 40, 50대는 모두 소임을 다하고 편집일선에서 물러났다.

30여년 동안, 간행물 직장에 몸 담아 여러 풍파를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잡거지역의 간행물은 꼭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아야 하고 그 존재가치가 뚜렷하여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어느 날 바람에 날려가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리여천 사장·주필의 바통을 지금은 안미영 선생이 이어가고 있다. 안미영 주필은 80후로서 희망의 새로운 세대이다.

안미영 주필이 인솔하는 《장백산》이 지금은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편집방침, 새로운 얼굴로 독자들과 대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위안을 받고 있다. 일손이 딸리는 상황에도 매기 30여만자의 원고를 편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대견스럽다. 

《장백산》 창간 40돐을 맞으면서 감회가 깊다.

험난한 《장백산》의 길, 40년을 이어온 《장백산》 식구들이 자랑스럽다.

자신들의 좋은 작품으로 《장백산》의 존재가치를 보여준 작가들이 고맙다.

그리고 《장백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를 구해준 귀인들이 그립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장백산》의 창시자 김택원 선생, 마송학 선생, 김정호 선생; 《장백산》의 귀인 리정문 주임, 김영준 주임, 호소 주석, 전용일 처장, 주윤정 처장, 리립후 처장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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