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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70돐 기념] 중국조선족소년보와 함께했던 격동의 나날 (한석윤)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소년보와 함께했던 격동의 나날


한석윤 전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나는 1982년 2월에 금방 복간되였던 연변소년보사에 전근하여 2003년 5월,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장장 21년을 소년보사와 함께하였다.


1967년 8월에 연변대학 조선문학학부를 졸업하고 북대황 3009부대농장에 가서 2년간 로동단련을 마친 나는 1970년 2월에 연변의약공사에 배치받아 창고보관원, 정무사업간사로 일하다가 1972년 2월에 자치주혁명위원회(후에는 자치주인민정부)에 전근하여 만 10년 동안 번역과 과원, 과장으로 사업하였다.


인민정부에서 사업한 이 10년간 자나깨나 내가 버리지 못한 꿈은 어려서부터 키워온 아동문학가로 되는 것이였다.


매년 년말총화 때면 나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상급부문에 아동문학을 할 수 있는 부문으로 보내줄 것을 간절히 청구하였다.


1982년 봄에 그런 기회가 왔다. 금방 복간된 《연변소년보》에서 편집일군을 수요하였다. 나는 당시 《연변소년보》를 주관하던 공청단 연변주위의 서기 전철수동지를 찾아가 나를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제기되였다. 그때 조직에서는 주인민정부 판공실 부주임으로 승진시키려고 나와 담화까지 한 때여서 공청단연변주위 산하 단위인 연변소년보사로 전근시키는 것은 간부사용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나는 전철수동지를 반복적으로 찾아다니며 나 자신은 자질이나 소질면에서 지도간부감이 못되고 또 아동문학가는 내가 어려서부터 키워온 꿈이기 때문에 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다시다시 간청하였다.


나의 간청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전철수동지는 나와 함께 장춘에 가서 직장암으로 병원에 입원해있던 조룡호 주장을 설복하여 끝내 답복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소년보사 전근 배경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여놓는 것은 소년보사 전근 당시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언론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때 내가 소년보사를 선택한 것은 소년보사에 가면 항상 어린이들과 가까이 할 수 있고 또 소년보 문예판면을 통하여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아동문학작품을 마음껏 발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소년보사에 전근한 이후 조선족어린이신문과 청소년사업에 대한 당과 정부와 우리 민족 지도동지들의 다함없는 관심과 배려, 그리고 광범한 교육사업일군들과 조선족어린이들의 절절한 념원과 기대에 감동되고 물에 젖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각적인 청소년언론인으로 태여났다.


소년보시절에 있었던 감격적인 일들은 내가 눈 감는 순간까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소년보사로 전근할 때 소년보사 편집실은 당시 주위청사(지금의 주농업은행청사) 뒤 울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소년보사에 출근하여 며칠후 나는 주위 서기 조남기동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번역과에서 일할 때 조남기 서기의 대회번역도 서보고 조선말규범화문제에 대한 조남기동지의 의견을 정리하느라 몇번 찾아간 적도 있었으므로 조남기 서기와는 안면이 있었다.


내가 소년보사로 전근하였다는 말을 들은 조남기 서기는 아주 잘한 일이라고 치하하고는 우리말로 된 소년보를 읽는 아이들이 없어지는 날이면 중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조선족이 사라지는 날이 된다고 하면서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가서 우리 후대들이 민족을 지켜가고 중화를 빛내여가는 역군으로 자라나도록 신문을 잘 꾸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이어서 소년보는 연변에서 꾸리는 지방신문이지만 반드시 전국에 널려 살고 있는 조선족어린이들을 잊지 말고 모든 방법을 다하여 그 애들도 이 신문을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재삼 당부하였다.


조남기 서기의 이 말씀은 후에 소년보사업의 지침으로 되였고 아동문학만 마음에 담고 있던 내가 청소년언론인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였으며 변변한 사무실 하나 제대로 없고 취재용 사진기 한대 없던 초창기의 기막히던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으로 되였다.


조남기 서기가 연변을 떠난 후 후임으로 온 주위 서기 리덕수동지와 공청단길림성위 부서기로 발탁된 전철수동지 그리고 공청단연변주위 서기 신봉철동지는 전국의 조선족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신문을 꾸릴 데 대한 조남기동지의 의견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 신문사와 함께 많은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런차 1984년 7월, 공청단중앙서기처 서기이며 전국소선대사업위원회 주임인 호금도동지가 연변에 사업시찰을 오게 되였다.


우리는 이 기회에 전국의 어디에서나 다 볼 수 있는 어린이신문을 만들어줄 데 대한 조선족어린이들의 간절한 념원을 중앙에 보고올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호금도동지가 연길에 체류하는 시간이 반날 밖에 되지 않아 시간을 짜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리덕수동지와 전철수동지는 신봉철동지와 내가 안도쪽으로 이동하는 호금도동지의 차에 탑승하여 차 안에서 보고를 올리도록 배려하여주었다.


《연변소년보》를 전국 조선족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으로 개간할 데 대한 보고는 이렇게 차 안에서 공청단중앙에 회보되였다.


우리의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조선족 교육정황과 학교 분포정황까지 일일이 묻고 난 호금도동지는 아주 좋은 발상이라고 긍정하고 나서 7월말에 열리는 중국소년선봉대대표대회 기간에 북경에서 동북 3성 공청단서기회의를 열고 결론을 짓자고 말씀하였다.


그날 저녁 호금도동지는 우리 신문에 “리상을 세우고 지식을 배워 연변의 꼬마주인이 되자!”는 제사까지 써주었다. 우리 신문과 조선족어린이들에 대한 최대의 배려와 관심이였다.


우리가 알기로 이 제사는 호금도동지가 나라 주석으로 되기 전에 써준 유일한 제사였다.


그해 8월 2일, 호금도동지는 북경에서 동북 3성 공청단서기회의를 소집하고 동북 3성 공청단위에서 련합으로 주관하는 조선족어린이신문을 꾸릴 데 대하여 결정하였다.


회의가 끝날 무렵, 우리가 조선족학교들이 동북 3성에 집중되여있는 정황에 근거하여 신문의 이름을 《동북조선족소년보》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제의하자 호금동동지는 내몽골자치구와 화북성, 북경시에도 조선족학교들이 있다는데 《중국조선족소년보》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였다.


우리 신문 이름은 이렇게 호금도동지의 제의에 의하여 명명되였다.


이날 회의에는 공청단길림성위 부서기 전철수, 공청단료녕성위 부서기 축춘림, 공청단흑룡강성위 부서기 왕렬화동지와 연변소년보사 부총편집이였던 내가 참가하였다.




그해 12월 12일, 동북 3성 공청단 서기들과 소년보 부장들은 다시 연길에 모여 소년보 개간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중국조선족소년보》 령도소조를 건립하고 신문의 대상, 성질과 임무를 확정하였다.


령도소조 조장은 공청단길림성위 부서기 전철수동지가 담임하고 부조장은 공청단료녕성위 부서기 축춘림, 공청단흑룡강성위 부서기 왕렬화, 공청단연변주위 서기 신봉철동지가 담임하고 성원은 동북3성 공청단위 소선대사업부문의 책임자인 맹려, 왕귀춘, 왕세춘 동지와 소년보사 총편집인 윤정석동지 그리고 내가 담임하였다.


신문의 성질은 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 등 3성 공청단위 령도 밑에 전국의 조선족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선대대보로 규정하였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과 공청단중앙, 동북3성 공청단위의 친절한 배려와 직접적인 령도 밑에 《중국조선족소년보》가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며 1985년 1월 2일 전국의 조선족어린이들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였다.


이어서 1985년 4월 4일에 우리 신문사가 길림성편제위원회로부터 현급 단위로 비준받고 6월 22일에 내가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총편집에 임명되였으며 1986년 12월 16일에 우리 신문사에 당조가 건립되고 내가 당조서기로 임명받았다.


그런데 신문은 출간되였지만 새로운 곤난에 봉착하였다. 신문사운영경비문제였다.


《중국조선족소년보》가 나올 때 동북 3성 공청단위에서는 신문사 운영경비를 각 성의 조선족어린이 비률에 따라 공동히 분담하기로 하였으나 그게 제대로 락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3성 공청단위에는 물론 3성 성위 책임자 앞으로도 보고를 올렸지만 진전이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나는 개인의 이름으로 민족사업을 주관하는 중공중앙 통전부와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였던 호요방동지에게 우리를 도와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올리였다.


편지는 그렇게 올렸지만 큰 기대는 걸지 못하였다.


당시 호요방 총서기는 림표반당집단과 '4인무리'에 의하여 붕괴의 변두리에 이르렀던 나라의 국면을 돌려세우느라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바삐 보내고 있었는데 언제 변강지구의 자그마한 어린이신문사의 일에까지 주의를 돌리겠는가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기적이 나타났다. 호요방 총서기께서도, 중공중앙 통전부에서도 내가 올린 편지를 읽어본 것이였다.


1986년 9월 16일, 호요방 총서기께서는 내가 올린 편지를 읽고 거기에 돈을 얼마 쓰지 않아도 되겠는데 중공중앙 판공청과 선전부에서 나서서 잘 처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회답의견을 썼다.


10월 20일 중공중앙 선전부에서는 료녕, 길림, 흑룡강 성위 선전부에 중선발 (86)154호 <《중국조선족소년보》운영경비에 대한 문제>라는 문건을 내여 호요방동지의 지시정신대로 조선족문자로 된 소년보가 잘 꾸려지도록 3성 재정부문에서 지지해주기를 요구하였다.


중공중앙 통전부에서도 9월 20일, 동북 3성 판공청에 통발문(86)(이)1232호 문건을 내여 《중국조선족소년보》를 잘 꾸리는 것은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에 관계되는 대사이므로 힘껏 지지해줄 것을 제의하면서 처리결과를 중앙 통전부에 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소수민족의 한 어린이신문을 두고 총서기가 직접 나서고 중앙부위들이 단독문건까지 낸 일은 지금까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천혜적인 배려와 관심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신문에 대한 이런 뜨거운 사랑과 배려는 그 후에도 계속되였다.


1987년 우리 신문이 발간 30주년을 맞을 때 전국인민정치협상회 주석 등영초동지는 “조선족어린이들이여, 나날이 향상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공산주의 후계자로 자라나자!”는 제사를 보내주었으며 전국인민정치협상회 부주석이며 전국부녀련합회 주석인 강극청동지는 “학습에 노력하며 분발, 향상하라!”는 제사를 써 보내주었다.


그외에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부허동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양정인선생, 중앙기률검사위원회 서기 강효초동지, 중공길림성위 서기 고적동지, 공청단중앙서기처 서기 리원조동지, 전국부녀련합회 서기처 서기 호덕화동지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과 저명한 아동문학가 빙심, 김근 선생도 제사, 축사를 보내주었다.


연변의 당, 정 부문과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도 우리 신문에 특별한 애정을 부어주었다.


우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소년보를 전국의 조선족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으로 만들 데 대한 발상부터 시작하여 《중국조선족소년보》로 개간하는 과정에 연변의 당, 정 부문과 우리 민족 지도자들이 앞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소년보》로 개간된 이후에도 계속 지극한 지지와 배려를 돌려주었다.


리덕수동지를 비롯한 주위 지도자들은 경상적으로 우리 신문사를 찾아오거나 신문사 책임자를 불러 신문사운영정황을 료해하고 신문편집방향을 제시해주었으며 우리 신문사에서 조직하는 각종 어린이행사에 직접 참가하면서 청소년사업에 힘을 실어주었다.


내가 소년보사에 임직한 기간 조남기, 리덕수, 라창진, 전철수 등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이 우리 신문에 써준 기념문장, 축사, 제사만 하여도 10차례가 훨씬 넘으며 신문사에서 조직한 매번 행사에 적어도 한두명의 주급지도자들이 참가해주군 하였다.



1987년 7월 4일, 우리 신문사에서는 연길시 예술극장에서 1200여명이 참가한 신문발간 30주년기념대회를 열었다.


그날 기념대회에는 중공연변주위 서기 리덕수동지, 부서기 장진발동지, 라창진동지, 전철수동지, 상무위원 리정문동지, 주인민정부 부주장 오장숙동지, 주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남홍렬동지, 두문금동지, 주인민정치협상회 주석 조봉명동지, 부주석 김영만동지, 원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최채동지, 전국소선대사업위원회 부주임 진해연동지, 공청단길림성위 부서기 마준청동지, 중국소년보사 사장 심위정동지를 비롯하여 중앙과 동북3성, 연변 관계부문의 지도자 수십명이 참가하였다.


신문 발간 30주년을 맞으며 주위 서기 리덕수 동지는 “미래를 위한 성스러운 초소에서 새로운 위훈을 떨치자”는 제목으로 기념문장을 발표하였고 주위 부서기 라창진동지는 주위, 주정부를 대표하여 기념대회에서 “새 세기의 새로운 주인을 양성해내는 길에서 새로운 기여를 하자”는 제목으로 축하연설을 하였다.


신문, 출판, 방송, 문화 분야의 기념대회에서 종래로 볼 수 없던 격동스러운 광경이였다. 이것은 우리 신문과 청소년사업에 대한 당과 정부와 우리 민족 지도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절절한 기대를 남김없이 보여준 것이였다.



우리 신문사의 전체 임직원들은 이런 관심과 배려와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하여 정말 한사람처럼 똘똘 뭉치였다.


우리는 “민족의 후대들을 새 세기의 역군으로 양성해가는 길에서 은행나무처럼 깨끗하게 살고 초불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가자”는 구호를 사훈으로 내걸고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 하북성, 북경시의 조선족 학교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조선족어린이들의 참 모습과 소선대활동을 우리 신문에 반영하였다.


그때 우리 신문사 기자, 편집들이 충성으로 찍어놓은 발자국들은 지금도 내 가슴을 진한 감동으로 뭉클하게 한다.


조선족어린이들한테서 “미더운 누나”로 칭송받던 김영금 기자는 어느 한번 취재차로 심심산골의 한 소학교에 내려갔다가 급성맹장염에 걸리여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였다. 그런데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그런 순간에도 김영금 기자는 자기가 취재했던 내용을 신문원고로 다 쓴 다음에야 수술대에 올라갔다. 그것을 본 병원의사들은 너무도 감동되여 “소년보사의 기자들은 자기 목숨도 마다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혀를 찼다.


우리 신문사의 임직원들은 이런 사람들이였다. 이런 사람들이 뭉쳐서 신문을 꾸려왔기에 우리 신문은 오늘에로 이를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신문의 편집지도사상을 “21세기 정보화시대, 국제화시대를 리드해나갈 창조형의 인재를 양성해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는데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이런 편집지도사상은 시대를 앞선 참신한 구호였다.


창조형의 인재양성을 이끌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소년보가 조선족어린이들의 여론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활동중심이 되여야 한다”는 방침을 제정하고 신문사가 앞에 나서서 각 학교에 창조적 사유와 재간을 키워낼 수 있는 각종 소선대활동들을 설계해주고 또 신문사가 직접 나서서 이런 활동들을 조직하여주었으며 이런 활동 가운데서 용솟음쳐나온 새로운 시대적 전형을 수립해가면서 소선대활동을 활약시키고 조선족어린이들을 이끌어주었다.


그때 우리가 조직해주었던 '창조컵'활동, '근로소대, 지혜소대창조'활동, '소선대 우수대장 평선'활동, '조선족10대최우수소년 평선'활동, '소발명, 소론문'콩클, '신동컵수학경연'활동, '전국조선족소년아동글짓기'콩클, '사랑의 일기 쓰기'활동, '신동컵 미술, 서예, 촬영'경연, '우수꼬마기자 평선'활동 등 시대적 맥박이 흘러넘치던 이런 활동들은 전국 조선족소학교의 소선대활동에 새로운 활약소를 불어넣어주었고 새대의 앞장에 선 새로운 전형들을 배출해내였다.


'소선대우수대장 평선'활동에서 용솟음쳐나온 전홍일, 림화 어린이는 전국 100명 최우수대장의 영예를 지니였고 글짓기경연에서 나타난 문학신동 김영옥, 전성광, 홍용암 어린이는 연변대학에 소년대학생으로 입학하였으며 '근로소대, 지혜소대창조'활동에서 태여난 홍매어린이는 중남해 서화청에서 등영초동지의 접견을 받았고 '소론문, 소발명'콩클에서 꼬마발명왕으로 떠오른 최강의 발명품은 빠리에서 열린 국제청소년발명전람회에 전시되였으며 '조선족10대최우수소년 평선'활동에서 나타난 선영어린이는 중국소년선봉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양상곤 주석의 옆자리에 앉는 영광을 지니였다.


그리고 우리 신문사에서 추천한 3명의 조선족어린이들이 공화국이 건립된 이후 처음으로 편찬된 《중국꼬마명인 50명》에 들어갔는데 그들로는 전국 '민족컵독창' 경연과 전국 '꼬마종다리독창'경연에서 1등상을 받아안은 서향화어린이, 국내외적으로 '주산신동'으로 영예를 떨친 지명자어린이, 집게식옷걸개를 발명하여 송경령기금회발명상을 받아안은 최강어린이였다.


이렇게 우리 신문이 전국 조선족어린이들의 여론중심, 활동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시대의 선도적 역할을 충분히 리행함에 따라 신문의 발행량도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소년보가 《중국조선족소년보》로 개간되던 1985년초에 5만부도 안되던 발행량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7만부를 돌파하여 조선족 신문, 잡지 가운데서 첫자리를 차지하게 되였으며 독자대상당 평균 발행량은 3명당 한부씩 돌아가 전국의 모든 신문, 잡지 가운데서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그리고 우리 신문은 길림성1급신문으로 평정되고 국가신문출판총국에서 추천한 전국 중점우수소년신문잡지에 들어갔으며 중국소년아동간행물사업자협회에서 진행한 제1회 중국우수소년아동간행물 평의에서 금상을 받아안았다.


우리 신문사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와 길림성 인민정부로부터 선진집체, 모범집체의 영예를 받아안았고 공청단중앙으로부터 여러차례 표창을 받았으며 중국소년아동간행물사업자협회의 회장단에 들어가 전국의 골간소년아동간행물로 활약하였다.


이 과정에 나 자신도 분에 넘치는 영광을 받아안았다.


1987년 천안문성루에서 나라 부주석 우란후동지의 접견을 받고 중남해 서화청에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영초동지의 접견을 받았으며 1990년 중국소년선봉대대표대회 때는 몇몇 안되던 특별대표로 초청받아 강택민 총서기, 양상곤 주석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고 1994년에는 소수민족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소년아동간행물사업자협회의 부회장으로 당선되고 2002년에는 제1회로 전국소년아동신문출판계의 최고상으로 불리우는 '엽성도상'을 받아안았다.


되돌아보면 소년보사에서 사업한 21년은 신문사는 물론 내 인생에서도 가장 보람찬 나날들이였다.


당과 정부 그리고 우리 민족 지도자들의 뜨거운 사랑 속에서 우리 신문은 전국 조선족어린이들의 여론중심, 활동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중국 소년아동신문출판계의 골간단위로 자라났으며 아동문학만 고집하던 나 자신도 당과 민족사회의 기대에 순응하는 자각적인 청소년언론인으로, 청소년사회활동가로 자랄 수 있었다.


그 감격과 격동은 정말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없다.


인젠 소년보사에서 정년퇴직한지 20년이 가까워 오지만 지금도 나는 그때 부르던 소년보사 사가를 부르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


산에 들에 곱게 피는 진달래 같이

조국의 품속에서 자라는 후대

그들에게 모든 사랑 고이 바치며

달려온 길 그 얼마냐 우리 소년보

아, 겨레 위해 나라 위해 래일을 위해

달려온 자국마다 충성 고였네


중화민족 대렬 속에 떳떳이 서서

찬란한 래일을 마중할 세대

그들에게 푸른 꿈을 키워주면서

변함없이 달려가자 우리 소년보

아, 겨레 위해 나라 위해 래일을 위해

찍어갈 자욱마다 영광 빛나리



제공:중국조선족소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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