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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조선족] 2.화룡2중 시절과 은사님들​(리광인)

조글로 zoglo.net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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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기억 

사진 클로즈업 70년대 사람들

- 광인이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


리광인


2.화룡2중 시절과 은사님들


고중 화룡2중 졸업사진 (1972.12.18, 옛사진들 모두 원 사진을 다시 촬영하는데서 효과가 많이 떨어져 이해를 기대합니다, 이하 모두)



70년대 옛사진 련재 2


70대 옛사진 련재 2는 70년대 초반 화룡2중(고중) 시절 옛사진들로 펼쳐집니다.  그 시절 사진도 고향에서의 중소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시각으로 단조로운, 사진들 거의 모두가 사진관에 가서의 친구들 사이 사진들이지요. 그것도 지금 찾을수 있는 남은 사진들 많지는 못하고. 사진관 사진들도 집체사진외 청일색의 남학생 사진들이니 그 시대의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옛 사진 아래  "인생소감"ㅡ"화룡2중 시절 은사님들" 올리였습니다 !)


우리 학급 반장 김광호와 나


친구 김창범과 함께


화룡2중을 졸업하면서


졸업을 앞둔 친구 석원서와 같이



석원서는 후에 군복무를 하고



친구 황춘산과 기념을 


친구 황춘산과 최길수(중간), 백동렬(아래) 셋 기념사진


군인으로 된 친구와 기념사진 남기었소


친구 리만수(뒤줄) 황춘산 석원서와 찰칵 !


친구 채호산도 후에 군인이 되였구


현성 주재 화룡현 광평농장 기숙사의 하루. 오인수(중간 분) 선배님 부부 농장련락소와 기숙사를 맡아 주어  


참군하는 친구 박춘길과. 우린 광평농장 출신   


친구 동병창과. 우린 광평농장 출신


광평농장 기숙사 화식원 아줌마 모시고.  앞줄 우1이 광평농장 출신 김동희친구


광평농장 기숙사 화식원 아줌마 단란한 가족


화룡2중 시절 학교농경지인 상관지 로동에 나섰다가


화룡2중 교사를 배경으로 우리 잊지 못할 순간을 남기며


5반 친구 최성춘과 둘이서 광평농장에 이르러


문학친구들인 4반 지천(뒤)과 5반 조학송(좌1) 우리 셋 !


화룡2중 졸업후 천안문에 이른 조학송친구


정인복 (앞 우1) 등 친구들 원래는 한 학급이였는데, 후에 이들은 림업국 자제로 림업국 소속 학교로 갈라지고



심인섭 담임선생을 모시고  


우리 학급 공청단지부 친구들  선후로 담임교원들인 구선생님(앞 좌1), 심인섭선생님(중간분), 최운송선생님(앞 우 1) 모시고



교장이고 당총지 서기인 박경선(중간줄 좌 3) 등 선생님들과 화룡2중 공청단총지 위원회와 학생회 기념사진

딱친구 지천이와 나. 지천이는 4반 단지부 서기 겸 공청단총지 조직위원이고 나는 3반 단지부 서기 겸 공청단총지 선전위원


화룡2중 졸업후 집체호시절을 거쳐 지천친구는 대학입시회복 전 연변대학 학생으로 (70년대 중반 연변대 지천을 찾아 손수 촬영)


지천친구와 연변대 교정에서 (1975년, 원 사진들 모두 제대로 인데, 이전 카메라로 다시 촬영하면서 사진들이 이같이 되여)


1반 공청단 지부서기 장두언과 극진한 친구사이


화룡2중 졸업후 그시절 현성 기차역 부근의 환성공사 단결3대로 하방한 집체호 동기 졸업생 친구들


화룡2중 3학년과 4학년 시절 선후로 우리 학급 담임교원으로 나선 구선생님(좌1), 심인섭 선생님(중간분), 최운송(우1) 선생님


우리 조선족 문단의 저명한 원로작가님이신 백호연 선생님. 화룡2중 시절 선생님은 우리 학교 교원으로 계시면서 사랑의 마음을 안겨 주시였다  (선생님의 따님 백진숙친구 제공)


나 인생사 중요한 한획을 그으신 화룡2중 시절 리두만선생님 ! (지금 선생님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인생소감】

 


화룡2중 시절과 은사님들





1


1970년 12월 초중을 졸업한후 가족을 따라 광평농장으로 이사하게 되였다. 광평농장은 하늘아래 첫동네라 불리우는 장백산아래 두만강 최상류에 위치한데서 봄은 평지보다 늦게 온다지만 오는 봄은 막을수가 없었다. 1971년 5월 초를 전후하여 광평벌 산과 들은 록음이 짙어가며 각가지 꽃들이 피여나기 시작한다.

백두고원의 광평벌에도 봄이 왔다. 꽃피는 새봄이 왔다. 철을 어길세라우린 광평령을 넘나들며 춘경생산과 봄파종에 여념이 없는데 농장원들 속에서는 내가 화룡에 가서 고중을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때까지도 소문의 출처조차 모르고있는데 소문이 무성하니 속상하기만 하지. 고중에 다니려는 생각조차도 없는 나여서 더구나 그러할수밖에.

련일 속상한 기분을 잘 풀리지 않는다. 사회주의 새농춘, 아니 지금은 사회주의 새농장을 건설할 만강의 열정으로 광평농장으로 달려 왔는데 내가 중도에서 물러선단 말인가? 자기만의 출로를 위하여 고중에 다니단 말인가? 아니지, 안될 말이지. 내가 나 개인의 출로를 위하련다면 중학교 졸업할 때 언녕 “네가지 지향”으로 갈것이 아닌가.

마음을 다잡으니 흔들림은 없는데 현실은 나 생각과 판판 다르다. 그해 1971년 6월 중순의 어느날, 결혼후 집을 따로 잡은 큰 형님이 나를 찾더니 좋은 일이 있다며 다짜고짜 화룡으로 가잔다. 농장지도부에 청가를 맡아야하지 않는가고 하니 농장의 김익순서기랑 언녕 동의하였다는데야.

웬 영문인지도 모르고 형님을 따라 200리밖 화룡현성의 광평련락소에 이르렀다. 물론 유일한 교통차ㅡ농장 해방패 자동차 신세였다. 광평련락소에서 큰형님은 어딘가 련락을 가지더니 다시 나를 데리고 화룡2중으로 간다. 그때에야 광평소문의 진실을 알게 되였으니 큰형님은 두어달전부터 벌써 농장지도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화룡2중과도 사전합의가 되여있었다.

그렇게 본의아니게 화룡2중, 즉 화룡고중을 다니게 되였으니 그날은 1971년 6월 21일. 그럼에도 처음은 개운하지가 못하였다. 그 시절 진실한 내 마음 드러내기다. 그러나 그로부터 근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도리켜보면 큰형님의 단호한 처사는 옳았다. 형님은 내가 나서지 않을줄 알고 모든걸 절대적인 비밀에 붙이였었다.

지금보면 그때 그 시절 큰형님의 결단에 탄복이 절로 난다. 큰형님의 적시적 결단은 나의 인생을 개변시켰으니, 그 결단으로 후일 나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다니게 되고 오늘의 나 인생이 있지 않았는가. 큰형님께 머리숙여 절을 하여야 했다. 그럼에도 화룡2중에 입학한 첫 시기는 큰형님을 잘 리해하지 못하여 원망도 없지 않았다.

 


2


그러나 원망도 잠간, 나는 인차 화룡2중이란 이 교육혁명의 새로운 전투강위에 마음을 다 빼앗겼다. 내가 공부하는 3학년 3반의 친구들은 나에게 새 희망을 기탁하기 시작하고 담임교원 심인섭선생님은 우리 학급에 “로숙한 학생”이 왔다고 여기저기 자랑이다. 그럴수밖에 없나부다. 나이는 금방 18살이라해도 공청단원인데다가 중학교졸업후 반년쯤 사회단련을 거치여온데서 학급의 재학생들보다 어딘가는 달라보인 모양이다.

얼마후 심인섭선생님께서 오전상과전 “날마다 읽기” 시간에 교실에 들어오시였다. 정색한 선생님은 조용하기를 기다리시더니 중요한 결정을 알리겠다며 주의를 모은다.

“학교지도부와 공청단총지위원회의 최신결정입니다. 리광인학생을 3학년 3반 단지부서기로 선포합니다!”

선생님의 뜻밖의 선포에 나는 놀라마지 않았다. 교실에서는 뜨거운 박수소리가 터져 올랐다. 또 이렇게 본의아니게 학급의 단지부서기로 되였으니 어깨가 무거워나지 않을수 없었다. 필경은 화룡시가지 본바닥 사람이 아니고 학급에 편입된지도 얼마안되는 시점이였으니.

그 시절의 화룡2중은 학생만도 1000여명에 달하는 이름난 화룡현 중점고중이였다. 우리 3학년 고중부만 하여도 다섯개반이라, 한개반 학생이 50명 정도라면 250명을 넘어서는 수자가 된다. 그런 화룡2중에 공청단총지위원회가 있고, 공청단총지위원회 지도를 받는 학생회가 있었다.

1971년 8월의 새학기를 맞으면서 학교지도부에서는 나를 화룡진 공청단위원회를 조직하기위한 진공청단대표대회 주석단성원으로 참가하도록 배려를 돌리였다. 뒤미처 화룡2중 공청단총지위원회 선전위원 중책이 나의 어깨에 놓이였다.  물론 학교내 전체공청단원회의 선거과정을 거치였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잊을수가 없었다. 조선족학교 화룡2중의 전신인 화룡1중은 큰형님 리광렬이 다니던 학교였다. 형님은 지난 50년대 중반에 토산중심소학교를 졸업하면서 월등한 시험성적으로 화룡1중에 입학했지만 1957년의 8월 12일 41세 한창 나이의 아버지 사망으로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하다가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자기가 넘어진 자리에서 막내 동생이 일어서라는 큰형님의 바람이 있은것 같다. 그러나 1971년 6월 하순부터 화룡2중에서의 학습과 생활이 시작되였지만 뒤따르는 압력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대의 압력은 공부에서 오는 압력이려니 문과류 여러 과목은 대수롭지가 않지만 리과류 수학과 물리, 화학은 앞이 캄캄하다. 리과류는 토산중학교 시절부터 이미 기초가 따르지 못하는데다가 반년나마 정상공부를 놓은데서 리과류가 뛰여난 학급 몇몇 친구들을 근본 따라갈수가 없다.

재직학생의 근본과업은 학습으로서 학습을 떠나선 그 무엇을 운운할수가 없다. 나는 8월부터 시작되는 새학기 학습계획을 세우고 새학기내에 리과류 난관을 돌파하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담임선생님과 공청단지부의 지도하에 학급에 몇개의 과외학습소조를 내오고 저녁과외학습을 견지하였다. 다음은 리과류 골간들인 학급의 주창송, 리화춘 등을 선생으로 모시고 이미 지난 기본기초부터 착실히 배우기 시작하였다.

 


3


어느덧 한학기가 흘러갔다. 1971년 그해 년말에 이르러 나의 리과류 성적은 일약 80점~90점으로 뛰여 올랐다. 최우수는 아니여도 급제계단을 뛰여넘은 우등계단은 탄탄히 자리잡았다. 드디여 나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여났다. 담임선생님과 리과 과임선생님들, 학급의 많은 친구들은 믿음의 눈길로 나를 보았다.

리과류성적이 올라가니 마음이 편하다. 마음이 편하니 맡은바 학교의반부식학습반과 공청단사업이 척척 풀리여간다. 학교 공청단총지위원회 선전위원이다보니 전교의 학생선전사업을 선차적으로 벌리면서 학교의 간보, 흑판보, 방송실 등도 책임지고 글쓰기를 내밀어야 하였다. 그래도 종일 발걸음이 가볍고 웃음이 절로 난다.

겨울이 다가오는 어느날 오후 과외시간을 타서 학교의 흑판보 글을 쓰고있었다. 처음에는 백호연선생님께서 다가오신줄도 모르고 정신을 가다듬어 분필글을 쓰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돌아보니 두툼한 회색솜옷을 걸쳐입고 노끈으로 두른 백호연선생님이 뒤에서 보고있었다.

“네가 리광인이라지?”

“네에, 3학년 3반에 다니고있습니다. “

“음, 어문교원 최삼룡선생님을 통해서 너 이야기 잘 들었어. 공부도 잘하고 글도 꽤나 쓴다면서.”

나는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였다. 그랬더니 백선생님은 말씀을 이으신다.

“이후 글쓸 때면 나를 찾아와. 최삼룡선생님의 부탁이지. 정치교원 리두만선생도 너를 상당히 평가하거든.”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부터 찾고싶었습니다.”

그러니 백선생님은 나의 어깨를 다독이시면서 크나큰 믿음을 주시였다. 날뜻히 기뻤다. 최삼룡선생님은 나 토산중학교 시절 한때 화룡에서 토산중학교로 통근하시면서 우리 어문을 가르친데서 익숙한 관계이고, 리두만선생님은 대비판원고로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받으며 무척 존경하며 따르는 선생님이였다. 대비판원고 원문 줄여쓰기와 부분 단락 늘여쓰기 등도 선생님만의 독특한 지도방법이였다. 대학졸업후 내가 뜻대로 중국조선족력사에 뛰여들수있도록 조건을 지어주신 이도, 나의 앞길을 열어준 이도 리두만선생님이셨다.

하루는 오후학습이 끝난후 교실에서 머물고있는데 리두만선생님께서 2중 바로 동쪽가 단층집에서 생활하시는 백호연선생님 댁으로 가자고하신다. 백선생님댁은 처음이니 그날 선생님댁 정주칸에서 글쓰기요, 시국이요 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른다. 그날의 이야기내용  대부분을 잊어버렸지만 백선생님께서 걸어오신 신상담은 금방 고중생인 나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4



그 시절은 잘 몰랐지만 백호연선생님은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교육가와 해방초기 중국조선족문학의 선구자의 한사람으로서 중국조선족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이셨다. 선생님은 선후로 할빈시 “민주일보” 편집, 연길시 “동북조선인민보” 출판과 부조장, 연변교육출판사 기간조 부조장, “교육통신” 주필, 연변인민출판사 기간조 조장, 연변사범학교 어문조 조장 등으로 활동하셨던 분이셨다.

 그러다가 50년대에 뜻하지 않은 “민족주의 분자”로 몰리여 크나큰 좌절을 당하게 되였다. 화룡현고급중학교, 지금의 화룡2중 교원으로 온것은 1957년 9월, 그런 선생님을 나는 가까이 모시며 가르침을 받게 되였다. 그후도 나는 선생님의 댁으로 수차 다닐 기회를 가지였다.

담임교원 심인섭선생님은 후날 선생님은 화룡2중 교장으로 사업하고 화룡현교육국 국장으로도 사업하신 화룡현의 이름난 조선족교육가였다. 그후 몇해후이지만 심인섭선생님은 선생님을 이은 새 담임교원 최운송선생님과 더불어 화룡에서 서남으로 200여리나 떨어진 장백산아래 광평의 나를 부르시고 나 대학입시 복습지도를 하시면서 복습자료 등을 제공해 주신 선생님들이여서 더구나 내내 잊지 못한다. 두 담임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후일 나 연변대 입학은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화룡2중 시절의 어문교원이고 은사님이신 리창윤선생님은 어떠했던가, 2중 재학시절 선생님은 우리를 직접 가르친 분은 아니여도 나를 각별히 아껴주시던 분이셨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화룡2중 부교장, 교장으로 활동하신 선생님은 1946년 화룡현 약수동 태생이고 1970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생으로서 제자인 나와 줄곧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내가 손수 전기로 정리한 약수동 항일렬사 리경천의 손자분인데서 더욱 그러한것 같다.

학교 교장이고 당총지서기인 박경선선생님은 또 어떠했던가, 선생님은 나를 당조직에서 조직하는 당과교육에 참가시키며 학생당원으로 발전시킨다며 최선을 다하시였다. 1982년 7월 연변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나를 화룡2중 교원배치 1호인물로 점찍으시였는데, 나는 나대로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을 선택하여 늘 죄송한 마음에 빚진 마음이다.

화룡2중 시절 나는 복받은 학생이였다. 소학교 시절도, 중소학교 시절도 그러하고 화룡2중 시절도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으니 나 인생의 복된 행운이였다. 나는 이러한 훌륭한 선생님들에게 지식을 배웠을뿐만아니라 사람이 살아갈 인생의 도리를 배웠으니 진짜 나 인생의 사다리역할을 하신 은사님들이셨다. 나 후일의 연변대 입학도, 대학졸업후 우리 력사와의 씨름도 모두 화룡2중 은사님들의 덕분이였다.

 

2020년 3월 31일 재정리


2020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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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选留言

  •  1

    朱青龙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돌출하게 선진으로 나섰군요. 사진도 많이 찍고 잘도 보관하였네요. 그것이 바로 옛 추억의 좋은 자료이지요.

  •  

    李光仁(朋友)

    幽兰静香ㅡ 정말 좋은 글입니다. 보아하니 선생님은 젊은 시절 부터 열심히 공부하시고 각종 활동에 활약적인 활동가셨네요. 은사님들 대공무사한 도움과 지지로 우수한 민족역사를 쓰실수 있는 좋은 작가가 탄생하였습니다 2920.4.6

  •  

    李光仁(朋友)

    权贞玉ㅡ 중학시절 동창들과의 따뜻한 우정과 자신을 훌륭히 이끌어주신 은사님들의 지성어린 손길을 가슴깊이 아로새기고있는 다정다감한 인정미에 깊이 감동됩니다 2020.4.5

  •  

    李光仁(朋友)

    真玉ㅡ 진짜 옛 학창시절을 회상하면서 감동되였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020.4.5

  •  

    李光仁(朋友)

    김재현ㅡ 네. 리창윤선생님은 저희 재학시 정교처 처장하시다가 교장선생님을 거쳐 훈춘진수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가셨습니다. 화룡고중 재작년 건교75주년 모임시 리퇴직교사 대표로 모셨습니다 2020.4.5

  •  

    李光仁(朋友)

    박관일님, 항상 고맙습니다. 백호연 선생님은 비범한 인물, 비록 불운한 인생으로 그 시절 화룡2중에 파묻히였지만...

  •  

    李光仁(朋友)

    김재현님, 화룡2중 은사님들중 출중한 인재가 많지요. 아는 분들 가운데도 백호연, 박경선, 박윤수, 리두만, 심인섭, 최삼룡, 리창윤 ...모두 보통 분들이 아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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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김재현님, 박윤수선생님은 알지만 개인적인 인연이 없어 아는것이 적습니다. 연변1중 교장은 알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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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김재현ㅡ 우리가 입학시 박윤수선생님 교장하시다  졸업하기전 연변1중 교장으로 전근하셨습니다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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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김재현님 고맙습니다. 우리 시절 박경선선생님은 절대적인 1인자였습니다. 그때 박윤수선생님은 부교장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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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리창윤 선생님, 선생님께서 구경회선생님 떠올려 고맙습니다. 구선생님은 심인섭선생님에 이어 한때 우리 학급 담임교원으로도 계셨는데 죄스럽게도 명함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구선생님이라고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운송선생님은 우리 담임이니 물론이지만 전혜숙선생님, 김파선생님, 남동순선생님도 우리 담임은 아니어도  좋은 인상을 갖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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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화룡2중 시절 리창윤 은사님ㅡ 아물아물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좋은 글을 감명깊게 읽었소. 사진에서 전혜숙선생, 구경회선생, 김파선생, 최운송선생, 박경선서기, 남동순선생, 于滨 등 여러분의 옛모습을 찾아 보았소.모두들 보고싶었던 분들이였소. 고마워요 2020.4.5

     

    作者

    선생님 반갑습니다. 죄송도 하구요. 지난해 2019년 6월 24일, 연길 국제호텔 1층홀에서 선생님 모시고 찍은 사진 같이 올린다는것이 깜박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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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최진옥ㅡ 만약 저의 눈썰미가 틀리지 않는다면  화룡2중 4학년3반 단지부 졸업사진에서 두번째줄 오른쪽 첫번째는 최경숙, 왼쪽 두번째는 최인자.그리고 석원서,채호산 등 네분은 상화1대 집체호로 나갔던분들 같습니다. 저의 집은 집체호 뒤집이였습니다. 그때 상화대대는 대채식대대로 부상하면서 집체호에 오셨던분들이 고생이 많았었습니다. 저의 엄마께서는 늘 부모 떨어져 산골에 와서 잘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만한다고 가슴아파 했었습니다 2020.4.5

     

    作者

    ㅎㅎㅎ, 모두가 옳습니다. 옛날 집체호 친구들 이름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네요. 채호산 최경숙은 가까운 동창친구들로서 부부사이로 되였습니다. 석원서는 무척 친한 사이였는데 후일 소식을 모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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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최진옥ㅡ 언제보아도 교수님께서는 자상한 분입니다. 옛날사진 보관 참 잘 했네요. 큰형님의 적시적인  결단이 교수님의 인생을 개변시켰네요. 사진속의 백호연선생님께서는 제가 1980년도 화룡고중에 입학했을 때 두달정도 일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일어기초가 없이 고중에 입학했던 저는 백호연선생님의 핍박(사랑)에 의해 일어관을 넘겼습니다.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늘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선생님신상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사회생활하면서 어느 문학잡지를 통해서 조금 료해하게 되였습니다. 2020.4.5

     

    作者

    반갑습니다. 우린 화룡2중 선후배로 되는군요. 더더욱 반가운 마음입니다. 오늘 이같이 백호연 선생님을 떠올리니 감개무량합니다. 선생님의 따님이고 작가로 활동하는 백진숙씨는 우리 그 시절 동기동창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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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안성호ㅡ 교수님 여가생활 다채롭고 풍부하여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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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박관일ㅡ 리광인교수님 글을 보면서 백호연작가님의 모습을 새롭게 알게되여서 감회가 깊습니다. 백호연작가의 단편소설 (꽃은 새 사랑속에)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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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김철ㅡ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소중한 추억과 은사님들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긴 옥고를 잘 읽었습니다. 비록 같은 세대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면에서 공감을 느꼈습니다.   저도 도움을 주신 은사님들이 있긴한데 찾아뵙지 못한 분들이 너무 많고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그리고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들도 잘 봤군요.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어려운 세월에도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적지 않은 기념사진들을 남기셨군요. 선생님의 인생 경력을 보면서 교육 많이 받았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유은종교수님깨서도 잘 지내시죠? 나중에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두 분 교수님을 찾아뵙도록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난리났지만 오늘도 바깥의 봄날은 유난히 따뜻하고 생기가 넘쳐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또 기대하겠습니다! 김철 드림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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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리성남ㅡ 잘보았습니다. 이렇게 학생시절이 영상으로 보전되니 더구나 생생하군요. 선생님의 앞길에 많은 은사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자신의 불타는 노력이 없이야 되였겠습니까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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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조현일ㅡ 교수님은  연변에서 유명한 화룡2중을 나오셨으니 좋은 은사님들도 만날수  있었고 따라서 좋은 교육도 받을수 있으셨네요. 이것도 이교수님의 자기 복 입니다~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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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英智ㅡ 곡절많은 한세대의 인생 이야기 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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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김재현ㅡ 저희들이 입학시 당총지서기시였던 박경선선생님께서 70년대 초에 벌써 교장, 서기 겸해 하셨네요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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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하나ㅡ 그 시대 사진들 올려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ㅎㅎ , 저도 고향이 화룡이라 기분이 좋습니다 . ㅎㅎ 좋은하루보내세요 20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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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似水人生

    사진으로 본 옛 추억 , 그리고 많은 이야기 적은 글 잘 읽았습니다,옛 사진속 광평농장 화식모 가정,염은숙(딸) 어머니가 광평에서 화식모로 계셨어요?저의 집과 한 줄에서 오래 살았었습니다.

     

    作者

    그래요, 정말 고맙습니다. 화식모는 광평이 아닌, 화룡 주재 광평농장 련락소 기숙사 식당입니다. 한때 화식원으로 계시며 우리와 사이가 좋았지만, 남편은 교원이구, 그외는 무얼 몰랐는데, 오늘 소식 알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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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云帆박삿갓

    혼란한 세월에도 귀인이 도와주어 세상이 따사롭고 흑백사진도 감미로운 추억 실어 더 없이 소중하구려

     

    作者

    항상 선참으로 고마운 우리 동창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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