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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력사] 양림과 주은래의 진지한 인연 (리광인)

조글로 zoglo.net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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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과 주은래의 진지한 인연 

리광인

2007년 5월 19 일 광주 황포군관학교 정문 현지촬영


편자의 말:

     지난세기 30년대 강서 서금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혁명근거지에는 홍군장령 양림(1901ㅡ1936)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양림은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선후로 중앙쏘베트공화국 로동및전쟁동원위원회 참모장,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병참부 참모장, 홍1방면군 보충사 사장, 강서군구 회창, 심오, 안원군분구 사령원, 월감군구 사령원, 홍23군 군장, 홍1군단 참모장,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 홍군대학 총군사교관을 력임한 홍군고급장령이요, 우리 겨레의 찬란한 별이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국조선족으로 우리 민족의 빛나는 혁명사, 항일사를 다는 몰라도 일대 위인 양림 정도는 알아야겠지요. 주은래의 믿음과 사랑속에서 중앙홍군대오에서 홍군의 고급장령으로 활동한 양림의 빛나는 발자취입니다.-리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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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7월, 양림은 중앙쏘베트구역 중공중앙국 서기이며 중앙쏘베트 로전(劳战)위원회 주임인 주은래의 부름을 받았다. 임신한 안해를 혼자두고 떠나야 하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남편이 서성거리며 무거워하자 리추악이 오히려 위안으로 나섰다.

“너무 걱정 말아요. 나 괜찮다니깐요.”

“추악이를 믿으면서도 마음은 번거롭구만.”

양림은 자기 마음의 고뇌를 그대로 표달하였다. 혼자 새생명을 돌봐야할 안해와 오랜만에 태여나게 될 자식으로 오는 걱정 그대로였다. 나중에 그는 안해를 뜨겁게 포옹하더니 어려울 땐 조직을 찾고 동지들을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는 발걸음을 떼였다. 석별의 순간이였다. 허나 양림이나 리추악 어찌 알았으리, 양림 떠나는 이 걸음이 그들 부부의 생의 마지막 리별이였음을.


리추악 (사진자료)


할빈을 출발한 양림은 렬차편으로 먼저 상해에 이르렀다. 강남기후대에 속하는 상해의 여름은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할빈에 비하면 불도가니 같았다. 상해에서 관련회의에 참가하고는 다시 상해를 떠나 배편으로 광동 산두쪽으로 가니 대지는 불처럼 뜨겁게 작열하는것만 같다. 양림은 숨막힐듯한 무더위속을 헤치며 산두-대부-장정 지하교통선을 따라 적점령구인 국민당의 봉쇄선을 헤치며 강서 서금에 이르러 주은래를 찾았다. 주은래는 양림을 만나자 두손을 꼬옥 잡아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몇해만이오, 벌써 5년이 되여오네.”

“네. 광주를 떠나 북벌전쟁, 남창봉기를 거친 것이 1927년 8월이니 5년이지요. 정말 가까이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른거지.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이 많고많다오!”

주은래는 그 자리에서 양림을 로동과전쟁위원회 참모장으로 임명한다면서 다시 두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조선인 양림에 대한 주은래의 절대 믿음이였다.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시절의 주은래 (사진자료)


로동과전쟁위원회(략칭 로전위원회)는 “혁명전쟁에 관한 모든 군사상,  경제상, 재정상, 로동상의 동원사항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 산하 전문위원회로서 중앙쏘베트정부내 경제, 군사, 로동 면에서의 모든 동원사업을 관리하며 전쟁동원에 관한 정부의 각 부와 위원회, 군구, 지방정부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여야 하는 중앙혁명근거지의 후방기관이였다.

양림은 우선 주은래 후방공작의 강유력한 조수였다. 그는 주은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군대와 인민군중을 동원하여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을 분쇄하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사업하였다. 다음 양림의 주요책임은 혁명전쟁에 내세울 신병훈련과 신병보충이였다. 이 신병훈련과 보충공작을 헤아리자면 중앙혁명근거지의 그때 현실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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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의 남창봉기와 추수봉기,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중국혁명은 잠시 저조에 처하지만 당이 지도하는 중국로농홍군이 각지에서 륙속 조직되면서 하나 또 하나의 농촌혁명근거지가 일어선다. 홍군대오와 농촌혁명근거지는 1929년, 1930년, 1931년 3년간에 직선상승식(直线上升式) 발전을 가져온다.

1930년 여름에 이르러 홍군의 주력부대와 지방무장은 약 10만명으로 발전하며 10여개의 쏘베트근거지가 형성되더니 1930년 11월부터 1931년 말까지 1년간 선후로 국민당의 제1차, 제2차, 제3차 “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분쇄한후 홍군과 농촌혁명근거지는 또 보다 새로운 발전의 길을 걷는다.

이에 비추어 1931년 11월에 서금에서 소집된 중화쏘베트 1차대회는 최초로 “홍군을 확대하고 공고히 할 문제”(扩大与巩固红军的问题)를 제출하였다. 회의에서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 주덕은 “홍군문제보고”를 하면서 엄격한 요구를 내놓았다.

“중국홍군은 반드시 수량확대에 노력하며 질을 제고하여야 한다”

쏘베트 1차대회에서 통과한 “홍군문제에 관한 결의안”도 그대로 엄격한 요구이다.

“반드시 지대한 노력으로 수량상, 질량상 홍군을 공고히 해야 한다”

이로부터 보면 홍군대오를 확대하고 공고히하는 문제는 각지 쏘베트근거지 당과 홍군의 선차적인 중요한 과업이였다.

1932년 2월, 중앙혁명군사위원회(中革军委)는 5개월내에 홍군주력을 배로 확대할데 관한 계획을 내놓았다. 이해 6월 중공쏘베트근거지중앙국에서 또 “우리는 백배의 노력으로 홍군을 확대하고 공고히하여야 한다. 이는 쏘베트당의 으뜸가는 과업”이라고 지적하였다.



광주 황포륙군군관학교 옛사진 (사진자료)


그러나 여러가지 제원인으로 홍군주력을 배로 확대해야 한다는 계획은 5개월이 지난 8월에 이르러도 중앙혁명근거지는 예정계획의 3분의 1밖에 완수하지 못하였다. 1932년 6월 장개석이 대거병력을 투입하여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제4차 “포위토벌”을 벌린데서 중앙혁명근거지 정세는 대단히 준엄한 상태에 이르렀다. 홍군을 확대하고 충실히하는 과업은 더는 미룰수 없는 일이였다.

중앙혁명근거지 로전위원회 참모장으로 부임한 양림은 근거지의 홍군확대와 구체실정을 헤아리는 가운데서 자기 어깨에 놓인 책임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마침 중화쏘베트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에 대비하여 “무릇 주력홍군을 확대하기 위하여 보내는 로농전사에 대해서는 부대를 정돈하여 전방으로 보내는데 편토록 하기 위해 모두 보충퇀의 집중훈련을 거쳐야 한다.”고 로전위원회에 지령을 내리였다.

양림은 또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 보충사 사장을 겸하였다. 제1방면군 보충사는 전문 포로병사를 훈련시켜 주력병퇀을 보충하는 책임을 맡은 사여서 보충사로 불리였다. 양림은 중앙집행위원회의 지령에 좇아 한두개 보충퇀도 아닌, 10개 보충퇀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일에 달라붙었다. 어마어마한 보충퇀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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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내에 10개 보충퇀을 조직하고 훈련시키자면 어려움이 많을거요. 당에서는 당신을 믿소. 당신이 있는한 이 과업은 잘 풀려 갈것이니.”

“고맙습니다. 최단기간내에 무조건 완수하겠습니다.!”

주은래와 양림의 대화였다. 양림은 총교관이기도 하고 직접교관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신작치과 헌신적 노력으로  한패 또 한패의 신입전사들이 보충사의 집중훈련을 거쳐 주력홍군에 수송되였다.


평전ㅡ홍군장령 양림. 민족출판사(조선문), 2012년 12월 출판


주은래는 몹시 기뻐하시면서 물심 량면의 지지를 안겨주시였다. 그러는 중앙령도동지가 고마웠고 양림은 뛰고 또 뛰여도 힘드는줄 몰랐다. 어려울 땐 수시로 주은래동지를 찾아뵐수 있었으니 양림은 또 행운아이기도 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세상이 널리 아는 주은래와양림의 진지한 인연이려니 두분 사이의 진지한 인연은 10년 세월을 거치고있었다.

1924년초에 양림은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로달려갔으며 황포군관학교 교련부(教练部) 학생총대에 배치를 받았다. 양림으로 말하면 황포군관학교는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시절로서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인 공산당원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을 자주 들으며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심장으로 받아 들이였다.

그때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이기에 앞서 리면은 중공광동구위 위원장이였다. 1922년에 조직된 중공광동구위는 말그대로 광주만의 지방구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주은래가 광동구위 위원장을 맡아 나선 시절은 광동 성과 하문, 향항 등지 혁명운동을 지도하는 당의 지도기관으로 떠올랐다. 그러니 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은 중국공산당의 주장으로 양림의 마음을 밝혀 주었다.

1925년 1월이후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원래의 교련부 학생총대 교관으로부터 제3기 학원대의 제4대 상위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때 혜주, 조주, 산두 등지에 반동군벌 진형명(陈炯明)이 도사리고있었다. 영제국주의와 북경 반동정부의 지지를 받은 진형명은 시시각각 광주를 공략하고 혁명정부를 뒤엎으려고 시도하고있었다.


평전 ㅡ 홍군장령 양림(한어문). 민족출판사, 2018년 3월 출판


그해 1925년 2월 초에 황포군관학교 학생군은 동정군 정치부 주임 주은래의 친솔하에제1차 동정을 가지였다. 양림은 주은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학생군 제3기학생대대 제4대 상위대장으로 200여명을 거느리고 동정에 뛰여들어 적들과 용감무쌍하게 싸워나갔다. 그달에 동정군(东征军)은 해륙풍농민들의 지지하에서 진형명을 쳐물리치고 조주, 산두를 점령하였다.

6월에 동정군은 주은래의 지도하에서 광주에서 회사한 뒤 또 운남군벌 양희문(杨希闵)과 광서군벌 류진환(刘震寰)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를 벌리였다.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생 대오와 함께 두렴없이 적진을 무찔렀다. 그들은 광동로동자들과 교외농민들의 지원속에서 단 반날시간내에 반란군을 소멸하고 위험한 시국을 돌려세웠다. 양림의 안해 리추악은 동정군의 선전대원이였다.

제1차 동정과 운남, 광서 군벌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들에서 주은래는 조선인 양림 부부의 혁명성과 헌신성을 보아냈다. 1925년 6월경에 주은래와 진연년((陈延年)이 지도하는 중공광동구위는 양림과 리추악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받아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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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이 지나 11월이 왔다. 동북의 11월은 북풍이 악을 쓰는 겨울철 시작이라지만 광동의 11월은 따스한 봄과도 같다. 이해 1925년 11월, 광동성 조경에서 중공광동구위가 지도하는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즉 엽정독립퇀)이 건립되였다. 주은래는 양림을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파견하였다. 그때 주은래의 지시로 퇀에 중공지부가 있고 영에 소조가 있었는데 양림이 당소조장을 겸하였다. 양림은 손중산선생이 령도하는 광주혁명투쟁 당시 손색없는 조선인의 우수한 대표인물이였다.

제3영에는 3개 중대에 500여명 장병이 있었다. 낡은 군대의 물을 먹은 군관들중에는 탐오하거나 전사들을 때리고 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양림은 소속 제3 영에서 반탐오, 반군벌작풍 투쟁을 벌리고 정치사상사업을 억세게 틀어쥐여 부대의 그릇된 기풍을 근본적으로 돌려세우고 부대의 전투력을 크게 높이였다.

그 시기 고요현의 반동지주들은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하여 수천명 지주무장을 끌어모았다. 이자들은 도처에서 농민협회를 파괴하거나 농민들을 죽이고 가옥을 불살랐으며 농민의 소와 재물을 략탈하여 원성이 높았다. 양림은 퇀부의 지시에 좇아 3영을 거느리고 령촌과 오촌 등지에 가서 농민들을 도와 반동지주를 진압하고 지주무장을 짓부셨다. 당지 농민들은 양림이 조선사람이란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양림의 또 다른 사진. 곤명ㅡ운남륙군강무당력사박물관, 2010.8.6.촬영


“양영장은 조선사람인데 우리를 도와 반동지주와 제국주의를 쳐부십니다. 우리는 혁명을 더욱 더 견지하여야겠습니다.”

그들은 조선인 양림에 대해 탄복한 나머지 농민운동에 보다 발벗고 나섰다.


1926년 3월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은 학교내 “손문주의학회”반동군관과 학생들과 함께 “중산함사건”을 조작하고 공산당원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중산함사건이후 장개석과 국민당 우파는 황포군관학교의 실권을 장악했고 황포군관학교내 좌파와 우파간의 투쟁이 자못 치렬하였다. 이럴 때 양림은 주은래의 소환지시를 받고 국민혁명군 제4군독립퇀을 떠나 좌파와 우파의 전투장인 황포군관학교로 돌아왔다. 1926년 4월의 일이다.

1926년 4월 양림은 주은래의 소환지시를 받고 국민혁명군 제4군독립퇀을 떠나 좌파와 우파의 전투장인 황포군관학교로 돌아왔다. 그는 주은래의 두리에 굳게 뭉쳐 황포군관학교내 반혁명우파세력의 진공을 단호히 배격하여 나섰다. 이 모든것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후에 남창봉기 시절 주은래는 남창봉기의 중공전적위원회 서기였다. 양림 등을 선두로 한 100여명 조선인들의 남창봉기 참가는 주은래에게 보다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황포군관학교 시절과 남창봉기 시절, 주은래와 양림의 진지한 인연, 이런 인연은 1932년 여름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 양림을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불렀다.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조선인혁명가 양림을 뜨거이 맞아준 주은래는 양림을 자기가 직접 지도하는 로전위원회 참모장으로 내세웠다.  양림은 중앙혁명근거지에서의 주은래 후방공작의 견실하고  충성스런 조수였다.


저자 리광인


사진속 양녕이 곧 양림. 광주 황포륙군군관학교 현지촬영 (2007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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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2월 8일, 중공쏘베트근거지 중앙국은 국민당군대의 련속되는 “포위토벌”에 대비하여 당의 긴급과업결의를 지으면서 “100만의 철의 홍군을 창조하여 제국주의국민당군대와 작전하자.”를 첫번째 과업으로 내세웠다.

결의는 또  반드시 신속히 로전위원회의 결정에 좇아 적위대, 소선대의 개편을 끝내야 한다, 20만단의 량곡을 빌어 혁명전쟁을 도우며 3.8부녀절 이전에 부녀군중들을 발동하여 5만컬레 짚신을 만들어 전방에 보내야 한다, 다리를 수리하고 길을 복구하는 등 일들을 군중들을 동원하여 2월말 이전에 끝내야 한다 등 허다한 구체과업을 제시하였다.

로전위원회의 사업범위는 몇배로 늘어났다. 로전위원회의 일은 주은래의 지도하에서바로 양림이 구체적으로 책임지고 나서야 하는 일이였다. 양림은 “100만의 철의 홍군창조” 과업을 심장으로 받들어나서는 한편  중앙혁명근거지의 각급 정부와 부문들을 지도하면서 군중을 불러일으켜 길닦이를 하고 다리를 놓으며 불철주야로 뛰고 또 뛰였다. 따라서 근거지의 부녀군중들을 널리 조직하여 5만컬레 짚신만들기를 힘있게 내밀었다.


강서 회창현성 부근의 월감성 혁명유적지 문무파 입구 왼쪽가에 위치한 "모택동과 월감성기념관" (2013년 9월 1일 현지촬영)


주은래와 사랑과 배려, 양림과 동지들의 노력으로 1933년 5월에 이르러 중앙혁명근거지의 새홍군전사가 근 2만명이나 늘어났다. 전선을 위한 길닦기와 다리놓기, 홍군짚신 만들기도 성과적으로 추진되였다. 이에 앞서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제2기 “혁명전쟁공채”(1932.11) 총액 120만원을 발행하자 동지들과 더불어 그 전부를 발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면서 제4차 반“토위토벌”에 쓸 단기비용 60여만원을 추가로 모으기도 하였다.

주은래가 양림을 중앙혁명근거지로 소환하고 로전위원회 참모장으로 등용한것은 현명한 조치였다. 양림이 쏘베트중앙국과 주은래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한데서중앙혁명근거지의 모든 후방공작이 새로운 면모로 질서있고 성과적으로 추진되여갔다.




1933년 3월 장개석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을 짓부신후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로전위원회를 총병참부로 개칭하였다. 총병참부는 홍군의 총사령부, 총정치부, 총참모부와 더불어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직속단위였다. 주은래의 믿음으로 양림은 계속 총병참부 참모장으로 뛰였다. 로전위윈회 참모장의 또다른 부름이였다.

양림의 로전위원회 참모장, 홍군 제1방면군 보충사 사장 시절이다. 이 시절 중앙쏘베트구역의 홍군주력부대는 중앙쏘베트구역에 대한 국민당군대의 제4차 “포위토벌”을 분쇄하고저 근거지의 남부를 떠나 북상하게 된다. 이 사이 광동의 흥녕(兴宁), 매현(梅县)지구와  복건의 상항(上杭), 무평(武平) 등지에 둥지를 튼 국민당 월군(粤军)은 민(閔,복건), 월(粤, 광동), 감(赣, 강서) 변계의 지주무장들과 야합하여 중앙혁명근거지 남부지구를 끊임없이 진공하며 안전을 위협하였다.

 

6


중앙혁명군사위원회(中革军委)와 신생한 강서군구는 강서군구 산하에 제3작전분구를  설립하고 제3군분구가 강서의 회창, 안원, 심오와 복건의 무평 4개현군사부와 하나의 유격대대를 통솔하며 중앙근거지의 남부 변계지구를 지켜서도록 하였다. 로전위원회 참모장 양림은 강서군구 회창, 심오, 안원군분구 사령원으로 부임되였다.


회창현 월감성 혁명유적지 문무파 강사가 "모택동과 월감성기념관"으로 안내하다 (2013.9.1 현지촬영)


군분구 정위는 중공회창현위서기로 있다가 1932년 6~7월간에 새로 조직된 중공회(창)심(오)안(원)중심현위 서기로 부임한 등소평이 맡아 보았다. 군분구 정위 등소평과 군분구 사령원 양림이 같은 시기, 같이 정위와 사령원으로 나섰는지를 알리는 력사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군분구 사령원은 선후로 여럿이 맡아 나섰었다. 회심안군분구는 선후로 무평의 (东留), 계갱(桂坑), 심오의 라당(罗塘), 회창의 장령(长岭), 균문령부용채(筠门岭芙蓉寨) 등지를 활동무대로 하였다.

제4차 “포위토벌”을 물리친후 중앙혁명근거지는 보다 늘어났다. 행정지휘의 편리와 남부지구의 발전, 개발된 월프람광(钨矿)의 백색구역과의 무역발전을 도모하고저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제48차회의는 1933년 8월 16일, 강서 회창에 월감성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월감은 광동과 강서를 포함한다는 뜻으로서 월감성은 우도(于都), 회창, 서강(西江), 문령(门岭), 심오, 안원, 신강(信康) 등 7개현과 흥룡(兴龙)현위, 무서(武西)공작위원회, 신강감(信康赣)현위, 원식(远殖)유격구 등 월감변계의 광대한 지구를 포괄하고 있었다.


모택동과 월감성기념관내 ㅡ양림을 사령원으로 한 월감군구 설립과 활동 전시부분 (2013.9.1. 현지촬영)


월감성 설립에 앞서 1933년 3월 25일, 강서군구 제3군분구와 제5군분구는  제23군으로 개편됨을 보인다. 중국로농홍군 제23군은  간칭 홍 23군으로서 중국로농홍군의 지방부대의 하나로 나타난다. 강서군구 회창, 심오, 안원군분구 사령원 양림이 신생한 제23군 군장으로 부임한다. 어떤 자료들에서는 류웅무(刘雄武)가 군장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양림이 제1임군장이고 류웅무는 양림의 후임 군장대리로 등장한다.

홍23군이 설립되여 3개월 만에 홍23군은 군을 사로 축소하는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통일명령에 좇아 월감군구 제22사로 축소된다. 월감군구는 이해 1933년 4월,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으로 원 강서군구 제3군분구와 제5군분구가 합병된 새로운 군구로서 양림이 사령원을 맡았던 원 제3군분구 소재지 회창현 균문령부용채에서 설립되였다.


월감성 혁명유적지 문무파내 월감성군구 옛집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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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문령은 오늘의 회창현 균문령진으로서 북남으로 위치한 회창현과 심오현의 중간지대에 자리잡고있다. 월감군구 사령원은 홍23군 군장 양림이 이어받으며 군구산하에 3개군분구(즉 3개작전분구)와 하나의 기간병퇀인 홍군 독립22사를 두었다. 이 홍22사가 홍 23군이 사로 축소되면서 형성된 부대이고  월감군구 산하 3개군분구와 홍 22사는 모두 월감군구 사령원 양림의 지도를 받았다.

신생한 월감군구는 중앙혁명근거지 남방전선의 최고군사지휘기관으로서1933년 8월, 월감성이 설립된후 중공월감성위가 활동하는 문무파로 소재지를 옮기였다. 문무파에는 문무파(文武坝) 모택동의 옛집, 문우파 중공월감성위 옛집, 문무파 공청단월감성위(少共粤赣省委) 옛터가 있어 회창 문무파의 역할을 잘 헤아릴수가 있다. 월감군구가 균문령에서 오늘의 회창현성인 문무파로 옮기였기에 력사유적지로 남은 월감군구 옛집은 지금 문무파촌에 자리하고 유람객들을 맞이하고있다.

2013년 9월 1일, 강서 정강산 현지답사차 회창현성 부근의 월감성 혁명유적지 문무파를 찾았다. 문무파 입구의 왼쪽가에 위치한 “모택동과 월감성기념관”내 전시 제2부분은 “월감군구의 설립과 활동”이였는데 월감군구 여러 지도자들 사진으로 꾸며진 구간에서 양림의 사진이 첫 사진으로 전시되여 있었다.


모택동과 월감성기념관내 월감군구 전시구간에 양림의 사진이 첫 사진으로 전시되여 (2013.9.1. 현지촬영)


“양림의 사진이 첫 사진으로 전시되였네요.”

“그젯날 월감군구에서 조선인 양림의 역할이 누구보다도 뛰여났으니까요.”

필자의 감탄에 동행한 강사는 월감군구 시절의 양림에 대한 학계, 혁명유적지 분야의  높은 평가를 소개하여 주었다.

양림은 그런 평가를 받을만한 분이였다. 1933년 7월과 9월 사이. 장개석이 50만의 병력을 투입하여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제5차 “포위토벌”을 시작할 때 근거지 안의 남방전선에는 홍군주력부대라야 홍 22사 밖에 없었다. 양림은 후임 월감군구 사령원들인 장운일(张云逸), 좌권(左权), 하장공(何长工)등과 더불어 월감군구가 월감성지방사업들에 참녜하는 외 주요한 과업을 지방무장을 장대시켜 유격전쟁을 벌리며 홍22사를 지휘하여 국민당 월군(粤军)의 진공을 격퇴하면서 중앙혁명근거지의 남대문을 보위하는데서 뛰여난 기여를 하였었다.           


   월감군구 사령부 조직서렬표

          

월감군구는 또 선후로 월감정진유격대, 감남정진유격대, 심남정진유격대와 무서유격지대를 조직지도하여 근거지보위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았으니 그 업적들에는 양림의 역할도 크게 깃들어 있음이 알려졌다. 이같은 역할은 회창현성 부근 문무파 월감성혁명유적지내 월감성군구 옛집에서 찾아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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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감성군구 옛집은 강남 강서풍격이 짙은 여러 채의 단층집으로 이루어지면서 바깥 정문입구에 “월감성군구옛터”라는 안내표시가 마련되여있었다. 바깥 대문이 잠겨있었지만 문무파 강사가 뒤따랐다. 정문입구에 들어서면 월감성군구옛터는 여러 칸으로 되여있고, 그중 한칸의 벽에 월감성군구사령부조직서렬표(序列表)가 걸려있었다.

조직서렬표는 1933년 4월부터 1934년 10월까지 기간을 가리키면서 선후로 월감군구 사령원을 맡은 6명의 이름을 밝히였다. 6명 사령원중 두번째가 필사제, 즉 양림으로 되여 대단히 고무적이여서 필자는 문무파 강사와 잠간 대화를 나누었다.


월감성군구 옛집 일각 (2013.9.1. 현지촬영)


“양림은 조선인이고 흔치 않은 국제주의 전사인데 관련 소개는 보이지 않는군요.”

“우리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양림은 홍23군 군장이고 월감군구 사령원이지만 양림 관련 연구자료가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집필한 조선문 양림평전이 민족출판사서 이미 출판되였습니다. 이제 한어문으로 번역출판하면 보내 드리지요.”

“양림평전이 나왔어요? 부탁 드립니다. 꼭 보내주었으면 합니다 !”

“알겠습니다. 양림은 월감군구 사령원에 이어 홍1군단 참모장으로 승진하였지요.”

문무파 강사는 알고있다며 고개를 끄떡이였다. 이는 력사적 사실로서 1933년 5월, 양림은 또 홍군 제1방면군 1군단 참모장으로 승진하여 중앙혁명근거지와 홍군부대에서의 양림의 지위와 역할이 보다 커졌다. 홍군 제1방면군 제1군단 참모장은 군급이상 군직이고 양림 생애의 최고군직으로서 홍군력사의 빛나는 한페지로 남아있다.


월감성군구 옛집 앞 모습 (2013.9.1. 현지촬영)


홍군고급장령으로서의 양림의 승승장구를 알리는 련이은 군직들. 1933년 5월, 주덕을 총사령으로 하고 주은래를 총정위로 하는 중국로농홍군 총부(홍1방면군 총부이기도 하다)가 설립되면서 홍1방면군의 모든 소속부대를 정돈하며 군편제를 일률로 사편제로 축소할 때 양림은 사장도 아닌 군급을 뛰여넘는 군단 참모장으로 승격하니 조선인 양림을 다시다시 보게된다.

 새로운 모습으로 떠오른 홍1군단은 산하에 군으로부터 사편제로 축소된 제1, 제2, 제3 세개사를 두었다. 군단장에 림표, 정위에 섭영진, 참모장에 양림(필사제), 정치부주임에 라영환, 후임에 리탁연(李桌然),정치보위분국국장에 라서경이 부임되였다.


양림이 사령원으로 활동한 월감성군구 옛집 그대로 펼쳐진다 (2013.9.1. 현지촬영)


양림은 림표, 섭영진을 군단장과 군단정위로 하는 제1군단의 참모장이였으니 1933년 그 시절에 벌써 홍군부대의 흔치않은 외국적(조선적) 홍군고급장령으로 자리매김했다. 중국홍군대오속 양림의 성장은 모택동과 주은래, 주덕 등 중앙령도동지들의 뜨거운 사랑과 친절한 배려, 우정의 산물이였다. 그후 이어지는 중화쏘베트 중앙집행위원으로서의 양림도그러하다.


강서 회창현성 부근에 위치한 월감성 혁명유적지 문무파 일각 (2013.9.1. 현지촬영)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 전국대표대회 개최지ㅡ 강서 서금의 사주패 대례당. 홍군 고급장령 양림이 2차대회 정식 대표ㅡ고려대표로 참가,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다 (2009.7.11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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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 기간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전국대표대회가 서금 사주패 대례당에서 성대히 열리였다. 2차대회에 참가한 정식대표는 693명이고 후보대표는 83명, 방청대표가 1500명, 모택동이 개막사를 드리였다. 그번  중화쏘베트대회에 고려대표, 대만대표, 안남(安南,월남)대표,조와(爪哇)대표가 참가하였는데 홍군 제1방면군 제1군단 참모장으로 활동하는 양림이 정식대표의 한사람인 고려대표로  대례당에 들어섰다.

양림은 높뛰는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조선사람인 자기를 믿고 중용하는 중국공산당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그는 중국공산당을 따라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룩하는 이 길에 조선과 조선혁명의 래일이 있음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사진자료)


제2차 중화소베트대회에 소수민족 대표로 양림 등 4명을 참석시킨 것은 중국공산당의획기적인 조치로 보아진다. 중국공산당은, 쏘베트정권은 “신교자유(信教自由)와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승인한다.”고 규정하면서 소수민족가운데서 “그들 자기의 민족문화와 민족언어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었다. 또, 쏘베트정권이 소수민족 간부의 “양성과 등용”(提拔)에 주의를 돌리면서 중국내 소수민족들도 한족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각종 권리와 의무를 향수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이에따라 홍군대오내의 조선인 필사제(양림)와 안남사람 홍수, 대만사람 채건(蔡乾, 蔡孝乾이라고도 한다), 조와사람 장연화(张然和) 등 넷이 소수민족대표의 신분으로 제2차 중화쏘베트대회에 참석하였다. 쏘베트대회가 열린 하루전, 이들 소수민족대표 넷은 대회비서처의 통지를 받고 22일 아침 5시 서금 교외의 훈련장에서 가진 성대한 홍군열병식(阅兵典礼)에 초청되였다. 여러 대표단들에서 한사람씩 뽑아 위문사를 드리기로 했는데 소수민족대표팀에서는 양림을 대표로 내세웠다.


2차대회 개최지 서금 사주패 대례당 내부 일각 (2015년 8월 27일 현지촬영)


제2차 쏘베트대회가 정식으로 열리던 날, 하늘땅을 뒤흔드는 폭죽소리와 군악소리속에서 모택동이 개회사를 드리였다. 모택동의 개회사에 이어 쏘베트대회는 대회주석단 75명을 선출하였는데 소수민족대표들인 양림, 홍수, 채건, 장연화 등 넷이 모두 대회주석단 성원으로 뽑히였다.

1월 24일 오후 2시, 모택동동지가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2년래 정부사업보고를 진술하였다. 1월 26일과 27일 대회는 여러 분조로 나뉘여 모택동의 사업보고를 토론하였고, 소수민족대표가 적은데서 양림 등 넷은 중앙대표단 소조와 합병하여 토론을 벌리였다.

대회기간 여러 대표들은 모택동의 2년래 정부사업보고, 주덕의 홍군건설보고, 림백거의 경제건설보고, 오량평의 쏘베트건설보고  등 보고를 듣고 수개를 거친 헌법대강, 쏘베트건설, 홍군건설, 경제건설 등 결의안과 국기, 국가휘장, 군기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하였다.


다큐ㅡ중국조선족항일투쟁사 촬영조가 서금 사주패 대례당 내부 촬영중 (2015년 8월 27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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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베트대회는 마지막 날인 2월 1일 오전에 모택동, 주은래, 주덕, 류소기 등 175명 중앙집행위원과 등자회(邓子恢), 강극청 등 36명 후보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양림은 홍수, 채건, 장연화 등과 더불어 175명 중의 중앙집행위원으로 떠올랐다. 양림은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수령인물들 속에 섞이며 윁남사람인 홍수(洪水)와 같이 두사람뿐인 외국적혁명가로 중국공산당의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한 중국공산당의 한 력사인물로 떠올랐다.

필자는 절강월수외국어대학 시절 여름방학을 타서 강서 남창과 서금, 홍군장정 발자취 련속 답사길에 올라 보았다. 강서 남창을 거쳐 서금으로 간 것은 2009년 7월 10일이였다. 쌍둥이 큰 딸애 설이가 동행하였다. 남창에서 오전 8시반경에 떠난 서금행 쾌속뻐스는 남으로, 남으로 달리며 오후 3시경에야 서금에 이르렀다.


2009년 7월 11일, 대학재학중인 딸애 설이와 함께 중화쏘베트공화국 제1차 전국대표대회 개최지 ㅡ 서금 엽평혁명사적지 원 사씨종사를 찾다


서금뻐스부 부근에 주숙을 잡고 가까이 서금광장과 시가지를 돌아 보다가 이튿날 7월 11일, 오전 7시 50분에 도시구역에서 동으로 5킬로메터 떨어진 서금 엽평혁명사적지에 이르렀다. 엽평사적지는 서금시 엽평향 엽평촌 구역에 자리잡았는데 관련소개를 보니 전국적으로 보존이 가장 잘된 혁명사적지의 하나로 알려졌다. 혁명사적지와 기념건축물이 22곳이라면 그중 쏘베트 1차대회 개최지를 망라한 16곳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꼽히였다.


중화쏘베트 1차대회 개최지 입구 모습 (2009.7.11. 현지촬영)


딸애와 더불어 선참 찾은 곳이 쏘베트 1차대회의 개최지였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인 1차대회 개최지는 원래 사씨종사(谢氏宗祠)로서 명나라 시절에 세워진 1층건물이고 1953년에 대외로 개방되여 오늘에 이르렀다. 건물안은 널다란 농촌구락부 모양이고 쏘베트1차대회가 열렸던 력사배경을 그대로 재현하여 우리 부녀간은 인차 당년의 쏘베트1차대회에 참가한 기분을속에 빠져 들었다. 대회주석대에도 오르니 보다 그런 기분이다.


중화쏘베트 1차대회 개최지ㅡ원 사씨종사 앞모습 (2009.7.11. 현지촬영)


중화쏘베트 1차대회 옛사진 (사진자료). 그번 1차대회 대표로 중앙홍군의 우리 겨레 최정무 참가


우린 중국의 첫 전국성홍색정권인 중화쏘베트림시중앙정부의 탄생지, 중공쏘베트구역 중앙국과 림시중앙정부기관의 첫 사적지에 서 있었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 임필시, 왕가상 등 로일대 무산계급혁명가들이 생활하고 사업한 곳,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떠오른 모택동—모주석이란 칭호가 처음 울려 퍼진 력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노라니 조선인 최정무가 1차대회의 대표로 이곳 사적지에 왔고, 대회주석단에도 오른 력사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엽평에서 활동한 양림의 거룩한 형상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중화쏘베트 1차대회 사적지와 더불어 홍군렬사기념정자와 홍군렬사기념탑, 홍군검열대, 모택동의 주숙지외 중앙 여러기관의 주숙지들을 돌아보며 내내 그러한 기분이다. 엽평사적지에서 양림의 발자취를 더듬을수 있는 보귀한 책들—외외풍비(巍巍丰碑,중앙문헌출판사, 2003년 5월 출판)  등 관련책들을 구하니 마음은 내내 울렁인다.


중화쏘베트 1차대회 개최지 주석단 모습 (2015.8.27.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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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엽평사적지에 이어 서금시 구역에서 서쪽으로 6킬로메터 떨어진 서금시 사주패진 로차정촌(沙洲坝镇老茶亭村) 북쪽가의 쏘베트2차대회의 개최지—중앙정부대례당을 찾았다. 이곳 북쪽가의 수림속에 설계가 특이하고 중서(中西)건축풍격이 드러나고 조형이 신선하고 공중에서 보는 외형이 홍군8각모 모양을 이룬다는 하나의 웅위로운 건축물이 시야에 안겨들었다.우리가 찾고저하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대례당이다.


중화쏘베트 2차대회 개최지ㅡ서금 사주패 대례당 (2009.7.11. 현지촬영)


중앙정부대례당에 들어서니 쏘베트2차대회의 기분이 그대로 묻어난다. 대례당 주석대 중앙에는 맑스와 레닌의 초상화가 모셔지고 주석대 우에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 붉은 프랑카드가 가로 걸리였다. 주석대는 력사모습대로 재현되고 온통 붉은기와 붉은색 프랑카드들로 덮이여 인상적이다.

주석대 아래 바닥에 놓여진 소박한 나무걸상들, 주석대 정면과 좌우면 벽들을 총총 메운 많은 창문과 드나드는 문들이 대례당 인상을 보다 깊이한다. 필자는 딸애와 함께 대례당 벽들에 오른쪽으로부터 차례로 걸린 2차대회 소개와 중앙집행위원 175명 프로필과 중앙후보집행위원 36명 프로필들을 눈주어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중앙집행위원 차례순위 번호 58에 필사제(즉 우리 양림)가 박혀 있었다. 개략적인 프로필은 중문으로 중앙쏘베트구역, 중국로농홍군대학군사총교관(中央苏区 中国工农红军大学军事总教官) 17사실은 그때까지 양림은 홍군대학 군사총교관이 아니다.였다. 이런 양림을 찾아 중앙혁명근거지의 홍색수도 서금으로 달려 간 우리, 그런 양림이 제2차 중앙쏘베트 중앙집행위원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니 그 심정은 이루다 말할수가 없다.

사주패의 대례당에서 또 2차대회에서 사업보고를 하시는 모택동주석의 사진과 대례당 정문에서 찍은 전체 대표들의 합영사진들을 찾아 보았다. 합영사진속 사람들이 깨알같아 누구누구 모습을 알아볼수는 없으나 저 대표들 합영사진속에 겨레 양림도 섞이였다고 생각하니 어디에선가 양림이 우릴 보고 환히 웃으며 손짓하는것만 같다.


중화쏘베트 2차대회 대표 합영 옛사진 (사진자료). 우리 겨레 양림은 어느 위치였을까...


 시각 필자의 뇌리에는 모택동과 양림의 만남이 떠올랐다. 그날은1934년 1월과 2월 중화쏘베트 제2차대표대회가 열리던 어느날, 모택동이 양림과 띄우게 되여 자연스런 대화가 오갔다.

“오, 양림동지구만. 조선동지로서 중국혁명에 나선다는것은 쉽지 않은일이오.”

“고맙습니다!”

“정말, 당신의 부인이 동북에 있다지?”

“네. 동북의 중공만주성위에서 부녀사업를 하고있습니다.”

“음, 알겠소. 인젠 한자리에 모여야지.”

모택동주석의 말씀에 양림은 뜨거운 난류가 굽이쳤다. 그번 대화후 모택동은 주은래와 더불어 중앙교통기관더러 신속히 방법을 대여 양림의 안해 리추악을 중앙혁명근거지로소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의 양림은 사랑하는 안해가 중앙혁명근거지로 막 달려옴을 상기하며 들뜬 기분이였으리라. 사주패 안팎을 거닐어보는 필자에게는 환각이 떠오른다. 환각속에서 양림은 그날의 그 들뜬 기분을 터놓고 있었다.



 12


양림은 근 2년전 동지들과 안해의 곁을 떠나 상해로, 중앙혁명근거지로 달려 올때의 걱정을 떠올린다.

그때 안해는 임신중이였는데...

해산이 순리롭게 되였을가?

옥동자일가? 공주일가?

지금쯤은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재잘거리겠는데...

양림은 오만가지 잔근심이 앞서면서 밤잠을 설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통신수단이 전부 단절된 열악한 환경속에서, 더구나 수천리 동떨어져  서로가 서로를 알수가 없었다. 양림이 리추악과 아이의 형편을 알게 된것은 모택동과의 만남 후였다. 중화쏘베트 2차대회에 중공만주성위 조직부장 하성상(何成湘)이 동북대표로 참가한것이 그 계기로 되였다.


회의기간 양림은 하성상을 찾았고 리추악과 아이의 소식을 알게 되였다. 하성상은 양림에게 1932년 7월 당신이 할빈을 떠난후 리추악은 만주성위의 지시로 중공주하중심현위 부녀부장으로 활동하게 되고 그해 년말 주하현내 흑룡궁 왕가점의 한 농가인 김씨댁에서 해산하였다는것, 해산후 리추악은 페병으로 시달린데다가 또 맡은바 일로하여 자기의 살붙이를 한 한족농가에 맡기였다가 돐도 되지 않은 아이가 그 농가에서 병으로 죽게 되였다는것 모두를 여실히 알리였다.

그때 하성상은 양림의 아이가 남자애일가, 녀자애일가 알리였으련만 지금 성별을 보여주는 그 어떤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하성상에게서 리추악과 아이의 이야기를 전해들은후 어떤 감정변화가 있었는지도 알수가 없다.


리추악연구에 따르면 주은래는 중화쏘베트 2차대회 기간에 모택동동지와 함께 만주성위 대표인 하성상을 만나 리추악의 형편을 자상히 물으시고 리추악을 중앙근거지로 전근시키자고 하였다고 한다. 양림과 리추악 부부의 일에 모택동과 주은래가 모두 깊은 중시를 돌리고 있었음을 알리는 귀중한 력사자료들이다.  

제2차 중앙쏘베트대회가 페막된후 중공만주성위 대표 하성상은 할빈에 돌아가 만주성위에 모택동과 주은래의 지시를 전달했고 만주성위는 리추악을 중앙혁명근거지로 소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험악한 환경에서 만주성위와 기층조직과의 련계는 극히 비밀적인 단선련계여서 리추악과 인츰 련계를 가지지 못하였다.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풍중운이 이 사실을 주하에 가서 리추악한테 알리였다. 그러나 때는 국민당이 대거병력을 풀어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제5차 “토벌”에 광분할 때여서 성위에서는 리추악의 안전을 고려하여 잠시 중앙혁명근거지로 가지 말것을 건의하였고, 리추악은 이 건의를 서슴없이 받아들이게 되였다. 양림과 리추악의 만남은 이렇게 무산되였으니 양림이나 리추악은 자기들의 뜨거운 감정을 마음속에 깊이 묻어야 했다.  (끝)


그 진실은 알지 못하지만, 리추악 사진으로 널리 퍼지는 또 한점의 사진 (사진자료)


2020년 3월 17일~19일 

제공: 李光仁  朝鲜族足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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