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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대륙을 발로 뛰는 사학자 - 리광인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대륙을 발로 뛰는 사학자

   홍군장정승리 80주년을 앞둔 2016년 6월과 8월, 우리겨레 홍군장령 무정과 홍군 작곡가 최음파의 인생 력정을 담은 인물평전이 륙속 출간되였다. 대륙을 발로 뛰여 선렬들의 일대기를 그려낸 력사학자 리광인 선생의 력작이 동시에 탄생된것이다.  

 

리광인 저 “무정장군”과 “최음파 평전”의 표지 사진     

  퇴직전 리광인 선생의 마지막 공식 직함은 절강 월수(越秀)외국어대학 한국어과 부연구원 겸 남방창작위원회 주임이지만 그의 명성은 력사학자로 더욱 통한다.   


  리광인 선생이 현재까지 집필출간한 력사서적은 20여부, 그중 2015년에만 6부의 저서를 다작하였다. 절강성 소흥에 거주하는 10년동안 리광인 선생은 20여만원의 사비를 털어 광활한 대륙을 홀로 누비면서 우리민족 력사와 관련된 흔적들을 더듬어냈다. 특히 2009년 여름부터 리광인 선생은 여름방학과 같은 여가시간을 짜내 겨레 홍군 영렬들의 로정을 따라 정강산과 중앙혁명근거지를 거듭 방문하고 천험이라 불리우는 오강과 금사강, 설산과 초지를 넘으며 2만 5000리 장정의 주요 유적지들을 일일이 답사하였다.   


  꼼꼼한 현장답사와 엄밀한 자료분석을 거쳐 탄생한 “홍군장령 양림”(38만자, 2012년), “백포 서일장군”(40만자, 2015년), “무정장군”(45만자, 2016년), “최음파 평전”(30만자, 2016년) 등 굵직굵직한 인물의 삶을 그린 평전들은 사학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2013년 10월에 있은 제1회 중국 조선족 실화문학상 심의에서 리광인의 인물평전 “홍군장령 양림”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였다.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양림은 중국 조선족의 혁명투쟁사에서 력사가 가장 오래고 급별이 가장 높고 중국혁명에 대한 공헌이 크지만 그와 관련된 사료가 절대적으로 결핍한 상황에서 저자가 두발로 뛴 간고한 현지답사의 로고가 돋보인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인물평전 “홍군장령 양림”의 속표지에 증정싸인을 하는 리광인 


   “조선족 항일 력사소설을 장차 쓰려고 리상을 세웠었는데 전적지 답사와 유가족 취재에 몰입하면서 허구에 의한 소설보다 진실한 력사를 발굴해내는데로 방향이 바꼈어요.” 


  1954년 화룡에서 출생한 리광인은 1978년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해 문학도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던중 대학 2학년을 마친 여름방학이 되는 1980년 7월, 할빈에 있는 동북렬사기념관을 찾은 리광인은 저명한 항일렬사 김순희 등 2,30여명의 조선민족 항일렬사들의 사적에 심취하면서 중국 조선족 력사연구로 전환한다.  


  1982년 대학졸업후 리광인은 연변일보사 기자와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원 재직시절 본격적으로 동북지역 항일유적지들을 메주밟듯 답파하여 풍부한 사료들을 쌓아놓았다. 여기에 초해 발표된 저서와 론문은 이미 300여만자에 이른다. 그중 “인물 조선족 항일투쟁사”(총 4권, 125만자)에 올린 150명 조선족 항일렬사 전기는 리광인이 홀로 발굴, 정리해 처음 빛을 보게 된것이다.    


  연변에서의 20여년간의 력사연구에서 리광인은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신중한 태도로 력사의 진실을 밝히고 오류와 와전을 시정하기에 노력하면서 향토 사학자로서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일찌감치 1980년대에 리광인이 찾아 만난 100여명의 항일투사와 사건 견증자들로부터 확인받은 구술들이 그로 하여금 력사의 시공간을 환원시킬수 있는 밑거름을 마련한것이다.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묻고 또 묻군 했습니다. 항일투사 려영준 아바이를 모시고 연변의 전적지들을 답사할 때였는데 장마에 갇혀 어떤 마을에 묵게 되였지요. 말문을 조만해서는 열지 않는 려영준 아바이도 권하는 술을 몇잔 받아 마신후 끈질지게 달라붙는 나의 성화에 못이겨 끝내 말문을 여는데 밤낮 사흘동안아나 구수한 전투이야기를 엮더군요.”     

 

연변대 시절인 1980년 7월 할빈에 소재한 동북렬사기념관을 찾은 리광인   

  2006년 8월 연변을 떠나 6천리밖 절강 소흥으로 자리를 옮긴 리광인은 겨레의 흔적을 찾아 대륙을 종횡무진 누빌수 있는 광활한 무대를 발견한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 맞춰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둔 밤 지나가고 빛나는 새날이 닥쳐오네.”(조선의용군행진곡) 공동의 외적을 무찌르기 위해 대륙을 주름잡던 우리민족 열혈청년들의 영상이 지척에서 감지되는듯 하였다.    


  절강성내부터 시작하여 리광인은 방학이나 주일휴식 여가를 빌어 린접한 상해, 강소, 안휘 등지를 전전하면서 고대 중조친선사와 문화교류사의 력사현장과 유적지들을 답사하였다. 국내 조선족 연구일군으로서는 맨 처음 “항주 고려사와 고려명승 의천연구”, “고대 해상왕 장보고의 활동과 국적문제” 등 가치있는 학술론문을 펴냄으로서 장강남북에 남긴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재확인하였다.     


  남방 연해지역에 새삶터를 옮긴 리광인의 겨레인물 유적지 답사열정은 활화산의 용암처럼 거침없이 분출되였다. 2007년 민족출판사의 의뢰로 양림과 무정의 인물평전 집필을 약속한 리광인 은 호기 하나 믿고 대륙의 곳곳을 발로 뛰기  시작하였다.   


   “현지에 가면 지역마다 당시 상황과 관련된 상세한 사료들이 정리출간돼 있어요. 이런 사료들은 기타 지역 도서관이나 박물관에는 없지요. 지역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올때면 그런 책자들을 가득 구입해 메고 돌아왔어요. 곳곳마다 양림에 관련한 편린들이 눈에 띄워 양림평전을 집필하는데 풍성한 사료들이 모여지게 됐어요. 현장을 답사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방법만으로는 권위적인 평전을 만들어 낼수가 없어요.” 


  혼자의 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작업인 “홍군장정 양림”의 집필을 완성한 리광인은 자신도 믿음이 잘 가질 않았다. 2009년 여름방학부터 2012년 7월까지 리광인의 대장정은 3년간 이어졌다. 순수 자비로 방학시간을 빌어 강서 남창부터 시작하여 운남, 사천, 감숙, 섬서, 산서 등 성의 30여곳을 전전하면서 양림과 무정이 경유했던 전적지들을 일일이 답사하였다.        


  양림평전을 완성한데 이어 리광인은 2016년 6월 18일 상해에서 평전 “무정장군”의 출간식을 가졌다. 2013년도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 중점작품 지원프로젝트(扶持项目)에 입선된 “무정장군”은 중국인민해방군 포병의 시조로 받들리는 조선민족의 전설적 영웅 무정(武亭)장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맨 처음 그려낸 력작이다. 무려 45만자에 달하는 장편평전인 “무정장군”은 지금까지 전설로만 전해오던 무정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사료에 기초해 형상과 색채가 다분한 인물을 재현해 주었다. 


  홍군장정 유적지를 탐방하는 과정에 리광인 교수는 양림과 무정은 물론 장세걸(张世杰), 진룡학(陈龙鹤), 진덕근(陈德勤) 등 조선인 홍군장령들의 사료들을 찾아냈을뿐만아니라 조선인 홍군음악가 최음파(崔音波)의 발자취도 더듬어보았다.   


  2016년 9월 19일(월요일) 연변대학에서 출간기념 세미나를 가지게 되는 “최음파 평전”은 바로 겨레홍군 유적지 답사과정에서 얻은 소재들과 복건 영안시 “홍군촌” 등지를 재답사한 기록을 바탕으로 집필한 인물평전으로서 중국 인민군대의 첫번째 작곡가로 불리우는 최음파의 유작들을 새롭게 발굴해내고 그의 미스터리한 마지막 족적을  쫓은 또 하나의 력작이다. 

 

2015년 8월, 복건성 영안시 석봉촌에서 촌민이 부르는  “홍군항일가”(최음파 작곡)를 듣고 있는 리광인 


  근 3년간의 답사는 성과도 풍성하였지만 유감도 없지 않았다. 양림의 희생지인 산서성 석루현(石楼县) 하가와(贺家洼) 마을까지는 찾아갔으나 양림의 시신을 안치한 묘소를 찾을수가 없은 그것이였다. 황토고원의 어느 골짜기엔가 외롭게 묻혀있을 영웅의 묘소를 지척에 두고 찾아내지 못하고 귀환길에 오른 리광인 선생은 다음번의 답사로 찾아내겠다고 기약한다.     


  자료정리와 원고집필은 답사의 고행에 못지 않은 간고한 작업이였다. 강의외 여가시간을 빌어 한달동안에 10만자 속도로 양림평전을 집필하던 도중 고혈압이 220까지 올라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인터넷 독이 대단해요. 컴퓨터앞에 두세시간 앉아 있어도 혈압이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 부득불 멈추고 잠깐 산책하다가 다시 집필했어요. 하지만 태산같이 쌓여진 사료들을 계속 정리해 일일이 책으로 만들어 내야 하니 멈출수가 없네요.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시간은 흘러가는데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력사연구 후배인재들이 고갈되는 상황에서 아직도 국내 각지에 숨어있는 겨레들의 옛자취를 외로운 서하객(徐霞客)처럼 홀로 답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과 긴박감으로 그는 항상 모대기고 있었다.       


  60고개를 이미 넘긴 리광인 선생은 자신이 세워놓은 집필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적어도 10년은 답사와 자료정리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월수 외대에서의 교사직업을 정리하고 2016년 4월 산동 위해로 이주한 리광인 선생은 민족의 발자취가 깃든 곳이라면 아직도 로익장의 정열로 현장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우리민족 력사연구를 평생의 집념과 추구로 삼아온 그의 답사로정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영훈

2016-09-16 中国朝鲜语广播CN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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