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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서언

“따웅—”

20세기 50년대 중엽에서 60년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그라운드에서는 자비가 없었던 “장백호랑이”들! 그 “왕자군단”의 두리에는 리광수, 박만복, 지청룡, 손중천, 지운봉, 허경수, 동경춘, 정종섭 등 쟁쟁한 축구인들이 대거 포진해있었다. 그중 정열의 20대나이로 길림성축구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그라운드의 승부사 박만복, 불멸의 기록으로 1965년 중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의 축포를 쏘아올렸던 길림성축구팀 그리고 자랑찬 그라운드의 파이터들…

그 전설의 시작은 어디였고 매듭은 어디였더뇨?

용용히 흘러가는 장강대하처럼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하는 그 격동의 시대, 가슴을 뛰게 하던 우리 민족 사나이들의 대서사시여!

무딘 필봉으로 그날의 감동을 찾아 중국조선족의 찬란한 체육사에 꽃바구니를 올린다.


1953년 3월,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운동대회에서 연변청년팀은 준우승을 따냈다. 사진은 상해시 진의시장으로부터 준우승컵을 수여받고있는 연변청년팀의 박만복(우 2)주장.



봉변

1963년 10월도 막 가던 늦가을의 연길, 오후 4시경의 공원다리.

싸늘한 추풍에 락엽이 뒹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이다.


찬바람을 피해 웃옷 목깃에 깊숙이 목을 파묻은채 부지런히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 그가운데 표표한 모습의 사내가 들어있었다. 다리 서쪽편에서 동쪽으로 넘어오고있는 사내는 남과는 달리번쩍 고개를 쳐들고있었지만 허청허청 옮겨놓는 걸음새에는 뭔가이름 모를 불안이 숨겨져있었다. 새치가 섞인 이마우의 머리칼이바람에 흩날리고있었다. 사내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쓰다듬으며 저만치 허공을 우러러 까닭 모를 한숨을 토했다. 이제 막 다리중턱쯤에 다달았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코앞으로 창날같이 날아드는 손가락이 있었다.


“야, 임마! 네가 우리 길림대를 떨궜다며? 왜 그랬냐? 왜?”

“아, 아니?”

순간, 사내는 초면에 다짜고짜 자신의 면상에 삿대질을 하고있는 그 중년남자를 멍하니 쳐다보다말고 란간쪽으로 몸을피했다.

“비켜주시오.”

“비켜? 젠장!”

어림도 없다는 투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터져나오는 고성과 함께 중년남자는 대판 싸우기라도 할 잡도리로 와락와락 팔소매까지 걷어올렸다.


“야, 임마! 네가 박만복이냐? 네가 그래 우리 대(길림성축구팀)에 새루 왔다는 그 지도냐? 야, 임마!”

중년남자는 술내를 확확 풍기며 어리둥절해있는 사내의 멱살을 와락 끄잡았다.

“야, 그래 그게 네가 국가팀에서 배웠다는 웽그리아기술축구더냐? 엉?”

“저…”

멱살을 잡힌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붉게 상기된 얼굴에는 치솟는 감정으로 푸들푸들 경련이 일고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드디여 꽥 소리를 질렀다.

“옳소. 그렇소. 우리 대가 강급한게 모두다 내 차실이요. 내가 잘못 지도해서 우리 대를 갑급대에서 떨구었소, 내가!”

“아니?”

“뭐야?”

“저 사람이…”

“박만복이라구?!”

“누구?”

순간, 다리우로 오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한테로 쏠렸다.


“박만복!”

그렇다. 생면부지 중년의 취한한테 멱살을 잡히고있는 그 사나이가 바로 박만복이였다. 1953년에는 중국 국가청년팀의 주력으로, 1955년에는 중국 국가대표팀의 주력으로 자신의 천부적인 축구재질을 아낌없이 국내외에 과시했던 그라운드의 풍운아 박만복, 하지만 그는 그 시각 연변인민들,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축구팬들에게 하나같이 “죄인”으로 단죄받고있었다.


1963년 10월 20일, 박만복이 지도를 맡은 길림성축구팀은 전례에 없던 최저의 순위(13등)를 기록하며 중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1) 에서 을급팀으로 강등했다. 치욕이였다! 무엇으로도 대신할수 없는 치욕이였다! 그 치욕의 뒤끝에 비발같이 날아드는 축구팬들의 서슬 푸른 눈총 그리고 타매, 야유… 아아, 그것을 어찌 몰리해에서 오는 감정의 폭발로만 보랴! 황차 언제 어디서나 이 나라, 이땅, 이 겨레의 축구를 항시 자랑으로 간직하고 그것과 함께 숨 쉬던 뜨거운 심장의 조선족축구팬들이 아니였더냐. 하다면 인간 박만복의 그 휘황했던 축구생애는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치욕의 허물로 남고 일장춘몽으로 끝나야만 했던가?


방금전…

박만복은 연길공원안에 자리 잡은 축구훈련장에서 주체육공작대 2) 황택균주임과 막 언성을 높이고 나오는 길이였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요? 우리 길림대가 갑급대에서 떨어지다니. 그래 주지도라는 당신은 대체 뭘 했나 말이요. 엉?”

가슴 아픈 울분을 도무지 삭일 길이 없어 출장길에서 돌아오자 바람으로 한달음에 곧장 훈련장에 올라온 황택균주임, 그의 안타까운 질문에 박만복은 할 말이 없었다.


1) 당시 강소성 남경시와 호북성 무한시에서 두개 단계로 나뉘여 진행됐음.

2) 오늘날 연변체육운동위원회의 전신임.



“당신 왜 말이 없소? 우리 길림대는 설립이래 이런 랑패가 한번두 없었는데 당신이 와서… 이게 그래 지금 세계적으로 제일 선진적이라는 웽그리아식축구이고 전술이요?”

“뭐라구요?”

순간, 박만복이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마저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실패인데 왜 자꾸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린단 말인가.


웽그리아축구가 어때서? 그 전술이 어때서? 만 28세, 그무렵 중국축구무대에서 가장 나어린 지도로서의 박만복, 그는 필경 혈기가 차넘치는 피 끓는 젊은이였다.


“그렇습니다. 모든게 제 차실입니다. 제가 잘못해서 떨어졌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그러니 빨리 처분이나 내려주십시오. 어떤 처분이라도 달갑게 받겠습니다. 전 지금… 처분만 기다립니다.”

“닥치오! 동무, 그게 책임지려는 태도요? 한 축구팀의 주지도로서 패전하고 돌아와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게요?”


황택균주임은 노여워서 목소리마저 떨리고있었다. 그 시각 박만복의 격정도 분수를 넘어 욱하고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만, 됐습니다. 지금 선수들마저 모두 저때문에 욕을 먹고있는데… 이제 제가 자리를 내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면 그만이 아닙니까?”

“아니, 이 사람이?”

별스레 북받치는 가슴과 함께 찡 저려나는 코등을 간신히 달래던 박만복은 황택균주임이야 뭐라 하든 홱 그대로 돌따서서 씽하니 훈련장을 나와버렸다.


좌로부터 김춘산(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비서), 황택균, 당봉상, 정지승, 박만복.



애매한 실패…


그랬다. 이번 실패는 우선 주지도로서의 그의 책임도 크겠지만 거기에는 억울한 일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운명의 시련이였다고 할가 아니면 운수가 사나왔다고 할가.


경기를 앞두고 길림성축구팀의 공격선에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생긴것이다. 거의 게임마다 대방의 꼴문을 작렬시키던 “제비” 동경춘이 돌연간 급성황달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할줄이야!


한편 길림성보다 기온이 섭씨 3~5도나 더 높았던(당시 무한은 최고기온이 섭씨 40도가 넘었음.) 남경, 오늘날처럼 홈앤드어웨이(主客场制)규칙이 아닌 집중시합규칙을 실시했던 그때 북방좌로부터 김춘산(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비서), 황택균, 당봉상, 정지승, 박만복.


지역이 연고지였던 길림성축구팀 선수들로 말하면 찌는듯한 무더위는 그야말로 악재가 아닐수 없었다.


무시로 덮쳐드는 갈증을 랭수와 사이다로 달래던 홍종우, 김석주와 수비선의 주력선수들이 배탈이 나서 경기장에서 퇴장하고 공격선의 주력으로 활약하던 허경수도 갑자기 급성맹장염으로 수술실에 들려가고 또 1962년, 갑급팀련맹경기에서 뛰여난 기량을 펼쳐 길림성축구팀의 “대포”로 소문 높던 지청룡, “8.1”팀의 리송봉(조선족)선수와 나란히 전국최우수공격수로 선정( 《북경석간》에 의해)되였던 지운봉마저 운수 사납게도 어찌된 영문인지 요행 차례진

페널티킥을 문대우로 날려보내는 등 사고가 련달아 터졌던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해(1963년) 갑급팀련맹경기에는 39개 팀이 참가하였는데 리그 결속과 함께 중국체육운동위원회 축구지도소조에서는 성적에 따라 갑급팀을 12개로 축소하고 나머지 팀을 전부 을급팀으로 강등시켜버리는 개혁을 단행했었다. 길림성축구팀의 순위는 13등이였다. “8.1”팀과 상해팀은 국제경기임무가 나지는통에 끝까지 련맹경기를 치르지 못했었다. 그런 사정에 의해 중국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이 두 팀을 등수에 배렬하지 않고 그냥 갑급팀자격을 보류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다보니 사실 길림성축구팀의 순위는 15등이나 다름없었다.


1955년에 설립된 이후로 줄곧 갑급팀행렬의 선두위치를 고수하고있던 길림성축구팀, 지난해까지만 하여도 갑급팀련맹경기에서 9승 4무 6패의 성적으로 5등을 하였던 길림성축구팀이 한해사이에 일락천장하여 을급팀으로 내려갔으니 전국의 조선족축구인들은 물론 축구팬들도 아연실색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휴-”

박만복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공원다리를 떠나 부르하통하강뚝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총과 야유를 뒤로 하고 터벅터벅 걷는 그의 가슴은 내내 체증에 걸린 사람처럼 숨막히도록 답답했다.

구경 실패의 원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류학하면서 배웠던 웽그리아기술형축구를 길림성축구팀에 도입한것이 그래 잘못되였단 말인가? 아니면 정말로 운수가 사나와서였던가? 아니면 길림성축구팀의 전통풍격을 버리고 기술형축구만 구사한것이 잘못이였던가? 하다면 그 전통이란? 풍격이란? 용맹? 완강?…

초연히 어깨를 떨구고 강기슭에 퍼더버린채 멍하니 강심을 바라보고있는 박만복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줄을 몰랐다…(계속)

选其一)


신철국

작가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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