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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6) 축구의 고향/잊은것과 잃은것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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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축구의 고향


1951년 12월 9일, 전국축구대회 페막식에서 가히 메가톤급에 비견되는 놀라운 소식이 터졌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 황중(黄中, 1915—1996년)비서장이 제1기 중국축구팀 대표 명단을 공포했는데 동북팀의 주력선수들인 조선족 김병규, 리봉춘, 최증석, 김룡호 등 4명이 한꺼번에 이름을 올린것이였다. 당시 조선족인구가 중국 전체 인구의 600분의 1도 안되게 백여만명 남짓했음을 감안할 때 이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뉴스가 아닐수 없었다…


연변의 축구운동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다. 일제의 등쌀을 못이겨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해 와서도 의연히 이중삼중의 압박과 착취를 받았던 조선민족은 자기 민족적 성격과 취미에 맞는 체육 및 민속오락 활동을 통해 울분과 서러움을 달래군 했던것이다.


1925년 10월 19일, 룡정에서 간도체육회(회장 강재후)가 설립된 뒤를 이어 각 지방에서 륙속 체육회가 설립되였다. 1922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민족이 집거하고있는 지방들에서 선후로 “국자가청년회”, “동진청년회”, “대흥청년회” 등 20여개 청년회가 발족되였는데 이러한 선진적인 민간단체의 결성과 함께 여러 지방에서는 야학을 꾸리고 반일사상을 고취했으며 그들의 주최아래 각지에서 빈번히 축구시합을 벌였다. 어찌 보면 간도체육회와 각지방체육회 및 선진청년단체들의 발족은 조선민족축구가 새로운 단계에로 올라설수 있는 조직적토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에 “9.18”사변이 터지면서 동북의 주요 도시들이 일제치하에 들어갔고 축구운동의 주요 기지였던 조선민족사립학교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대량 페교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축구선수들이 정든 교정을 떠났다. 이처럼 간고한 나날에도 조선민족이 집거한 도시와 농촌들에서는 각종 형식의 축구경기를 펼쳐 나갔는데 이것이 차츰 축구가 조선족의 전통적인 스포츠종목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는 축구대회를 빌어 항일지사들이거나 선진적인 지식인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만행을 폭로, 규탄했고 반일민족사상을 선전하였다. 우리 민족의 이름난 저항시인 윤동주도 학생시절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의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일본인들이 만주에서 펼친 “일만대항축구경기”는 동북인민들의 민족적자존심을 크게 격발시켰고 해마다 진행된 괴뢰만주국축구운동회는 재만 조선인들이 민족의 정기와 슬기를 충분히 과시할수 있는 무대로 되였다. 특히 조선민족축구인들을 대표로 한 간도축구는 괴뢰만주국축구무대에서 시종 왕자의 기세로 민족의 기개를 떨쳤다.


1945년 8월 18일, 쏘련홍군과 동북항일련군은 일본관동군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연변을 해방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였다. 그해 10월 26일, 중화전국체육총회 제1차 대표대회가 북경에서 소집되였다. 원 중화전국체육협진회의 리사들과 각 성, 시 체육분야의 대표들 그리고 해방군, 교육부,전국총공회, 전국부녀련합회, 공청단중앙, 전국청년련합회, 전국학생련합회 등 관계부문의 대표들과 소수민족대표들 도합 180명이 회의에 출석하였다. 회의에서는 중화민국시기의 중화전국체육협진회를 중화전국체육총회(즉 중국올림픽위원회)로 개조할 결의를 채택하고 체육총회 위원 명단을 통과하였다.

창동학교 학우축구팀(1937년).


이렇듯 체육에 대한 국가의 관심이 비등함에 따라 해방전부터 널리 보급돼왔던 조선족축구는 국가체육운동위원회와 길림성정부의 각별한 중시를 받게 되였다. 특히 지리적으로 조선족이 집중되여있던 연변은 길림성축구가 전국에로 진출할수 있는 유일한 축구기지로 부상했다. 이는 전국적인 축구대회때면 연변선수들이 자연스럽게 길림성을 대표해 출전하는데 튼실한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1955년 8월 1일,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는 드디여 장춘에서 길림성축구팀을 결성한다고 선포했다. 코치와 지도를 제외하고 말짱 조선족선수들인 길림성축구팀은 그해 년초 대련에서 펼쳐진 전국대중도시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던 연변팀 선수들로 구성되였다. 코치에 왕택청(王泽清, 한족), 지도에 마소화(马绍华,한족)이고 선수로는 박상복, 리광수, 리창린, 김근원, 김방춘, 방정훈, 김동하, 장룡백, 김익갑, 박완식, 최철봉, 허동준, 안기복, 리명덕, 김태환, 손중천, 리룡남, 김상희, 김흥석, 조송춘, 전만수, 리봉석, 허명룡 등이였다. 그때 팀의 주장이였던 박상복은 선수들중 좌상으로서 중앙방어를 맡아보았다. 룡정이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축구뿐만아니라 정구, 야구, 륙상, 스케트 등 다양한 체육종목을 섭렵해왔는데 이듬해 전국 제1기 축구지도강습반에 참가한후부터 장기간 팀의 지도를 담당했다. 길림성축구팀은 그해 전국축구대회가 끝나자(7등) 선수진을 새롭게 조절하면서 지청룡 등 10여명 선수들을 “수혈”했다.


초창기 길림성축구팀 선수들은 모두 고중이상의 고학력자들로서 비교적 문화적수양이 높고 접수력이 강하며 훈련, 시합과 생활에서 자각성이 높았다. 그들가운데 많은 선수들은 퇴역한후 체육분야에서 이름난 지도로 되였거나 기타 분야에서 성망 높은 교육가, 전문가로 변신했다. 방정훈은 중학교와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지식인이였다. 그는 길림성축구팀 설립초기부터 중앙수비수를 맡았는데 머리가 명석한데다 기술이 능숙하여 일찍 국가축구건장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후 지도로서의 풍부한 수업을 받고 훈련지도 경험을 쌓은 뒤 연변녀자축구팀 지도로 되여 1983년에 펼쳐졌던 전국녀자축구경기에서 1등을 따내기도 했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원으로 있던 허명룡은 1955년말에 전근령을 받고 길림성축


초창기 길림성축구팀(1950년대 장춘에서).


구팀에 와서 중앙수비수를 담당했다. 당시 팀내 유일한 대학졸업생으로, 전국에서도 몇명 안되는, 대학교육을 받은 축구선수로 알려졌던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뛰여난 분석력과 강한 조직능력을 소유하고있었다. 퇴역후 그는 1960년대로부터 장기간 길림성축구팀의 코치를 담임하면서 리광수, 박만복 등 지도들을 도와 행정적, 기술적인 면에서 성공적으로 팀을 운영하는데 일조했다.


길림성축구팀은 설립된 그날부터 만방에 자신의 생명력을 과시했다. 1955년 12월, 리광수, 손중천, 김방춘 등 선수들이 국가팀에 입선됐고 이듬해에는 손중천이 제16차 올림픽 예선에 참가하는 영광을 지녔다. 또한 이때로부터 조선족축구는 길림성축구팀을 핵심으로 한 체계적인 훈련시스템과 양성시스템을 갖추게 되였다. 1957년부터 1959년 사이에 지운봉, 동경춘, 허경수, 박장수,김석주, 정지승 등 나젊은 선수들이 길림성축구팀의 믿음직한 후비력으로 자라났다.


잊은것과 잃은것


“지운봉, 허경수, 김정식이 허리께를 맡고있는걸로 알고있는데?”

“네. 동경춘, 문승학, 지청룡이 앞쪽을 맡고 뒤쪽은 정지승, 홍종우, 류진석이…”


“가만있자. 방금 말한 그 동… 뭐드라, 공격수 11번이?”

“경춘이를 그럽니까?”

“그래 맞네, 맞아. 동경춘, 그 사람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지금은 어떤가?”

“의사들이 말하기론 급성황달간염이라고 하던데요…”

다시 고개를 떨군채 처연히 발끝에 시선을 박고있는 박만복을 한동안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고있던 박로석이 가볍게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 인젠 후회해봤자 모두가 지난 일이야. 이왕 남자라면 용기를 내게나. 사내답게 말이야. 실패를 총화해보고 경험교훈도 섭취하면서 다시 일어나야 해. 그 길밖에 없네. 그게 바로 이제 자네가 해야 할 일이지.”

“사내답게 일어선다구요?”

“그래, 사내답게 일어서는거지!”


숯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듯한 박로석의 열띤 눈길이 박만복의 얼굴을 뜨겁게 직시했다. 신뢰와 고무격려가 어린 눈길이였다. 찰나, 박만복의 뇌리에는 공원다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향해 창살같이 손가락을 뻗어오던 그 중년남자의 성난 얼굴이 얼핏 지나갔다.


“아…”

박만복의 가슴이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렇다, 다시 일어서는것이다, 재기!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재기이고 나아가야 할 길은 오직 그 길밖에 없다. 유일무이라고 했던가? 오직 하나만 있고 둘은 없음을 가리킬 때를. 그리고 동산재기라고 했던가? 동녘 동(东), 뫼 산(山), 거듭 재(再), 일어날기(起)…


“실패는 병가상사라고 나도 한때 그런적이 있었지. 그 시절에 지도가 아닌 선수였지만 말이네. 아마 그해가 1942년 7월말쯤 됐을거야. 그 장춘 아옥공원(儿玉公园) 있잖아. 지금은 승리공원(胜利公园)이라 고쳤더만. 그 공원에서 소위 만주국대표팀축구선수를 선발하는 시합이 있었는데 허허, 그때 글쎄 더럽게두 우리가 생판 져본적이 없던 길림대(길림시대표팀)한테 그만 당하고만거야. 난생처음 0대1로 말이지. 그게 죄다 일본놈 심판때문이였어. 한창 비가 내리는 진흙탕속에서 시합을 치르는데 어떡하다 길림대의 선수가 우리 문에 꼴을 넣은거야. 사실 우리가 그 꼴을 먹은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그 길림대의 선수가 우리 간도성대 문지기의 허리끈을 불쑥 쥐여당기는 바람에 그만 팬티가 내려간거야. 바빠맞은 문지기가 팬티를 춰입느라고 그만 공을 놓치고만거지. 그러면 당연히 시합을 중지시키든가 아니면 꼴을 취소해야 할텐데 주심을 맡은 일본놈심판이 당나귀고집을 피우는거야. 사전에 뭘 받아먹었는지 길림대의 역성만 들어주면서 통 옳은 판정을 내리지 않아서 끝내는 지게 됐지만 그번 경기서 소문을 놓은건 오히려 우리쪽이였어. 진흙탕속이다보니 공에 흙이 가득 달라붙어 근본 멀리로 찰수가 없었거든. 그런데도 우리가 넘어지고 꼬꾸라지면서도 공을 몰고 마지막 끝까지 이를 악물고 뛰여다니니까 관중들이 도리여 우리를 응원하고 나선거야. 그러자 주석단에 있던 일본놈들이 저눔 ‘조센징’들은 원체부터 악바리종자니까 절대루 가만 놔두면 안된다면서 생진

저리를 치는데. 허허허…”


당시 간도성축구팀의 주력선수로 활약했던 박로석은 원체 체질이 좋고 공도 잘 다루어 그번 경기때 크게 소문을 놓았다.

“그래서 말인데…”

박로석이 잠간 말끈을 놓고 의미심장한 눈길로 멀리 강심을 응시했다.

“이번에 자네가 실패한게 혹 그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네.”

“심판… 말입니까?”

박만복이 의아한 눈빛을 짓자 박로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우리의 전통 말일세. 그제날 우리의 ‘악바리’근성 말이야…”

“네-에?”

박만복은 말꼬리가 휘익 길어지면서 두눈이 데꾼해졌다.

“전, 전통을 잊었다구요?”

“그래. 내가 보기엔 전통을 잊은것 같아. 아니, 잊은게 아니라 잃었다고 해야 하나?”

“잃었다구요?”

“그렇지, 우리 길림성대가 자고로부터 숭상해왔던 조선족사내들의 용맹하고 완강한 풍격 말일세.”

“용맹하고 완강한 풍격?”

“그렇지. 그 어떤 강적이라 해도 두려움이 없이 용맹하게 돌진하고!”

“……”

“재치 있게 련락하고 돌파하며 대담하게 찌르고!”

“……”

“뒤졌다 하면 마지막 1분1초까지 박투하는!”

“……”

박만복한테 하나, 둘 손가락을 꼽아보이는 박로석의 표정이 더없이 근엄했다.

(아니, 그럼 내가 우리 팀은 기술이 없고 오직 용맹하고 완강한 정신에만 의거하고있다고 생각한것이 잘못된 판단이였단 말인가?)


1962년 8월, 박만복이 북경청년팀의 우월한 대우를 뿌리치고 단연히 길림성축구팀의 지휘봉을 잡게 된데는 그의 뜨거운 고향애와 피 끓는 민족애가 한몫하고있었는데 어찌 보면 때로는 그런 순수한 감정이 잔혹한 승부의 세계에서는 악재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즈음, 전국소수민족가운데서 유일하게 갑급자격을 갖춘 조선족팀이자 전국적으로도 평판이 높던 길림성축구팀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잔소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팀은 용맹하고 완강하나 기술과 지혜가 부족하다”는 평가였다. 전장에 나선 병사로 놓고 말하면 투지가 좋으나 싸울줄을 모른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국가팀 동료들이 혹간 길림성축구팀의 경기를 관람하고는 이렇게 주고받는 말을 들을 때면 조선족으로서의 박만복은 이름할수 없는 모욕을 느끼군 했다. 전장에서 아무리 투지가 좋아도 싸울줄 모른다면 이미 진것이나 다름없기때문이였다. 중국축구선수들중 최초로 웽그리아에 류학을 가서 당시로서는 세계 일류의 축구정수를 접했던 그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길림성축구팀이 의지뿐만아닌 기술에서도 일류이고 또한 그만큼 지혜롭다는것을 한번 화끈하게 보여주고싶었던 그!


쏘련원정경기에 나선 초창기 길림성축구팀(우 1 .리광수, 우 3. 지청룡).


대저 축구에서의 풍격이란 팀의 풍모, 기술과 전술 특점을 가리킨다. 이른바 팀의 넋이자 령혼이다. 이런 풍격은 왕왕 자기 팀선수들의 신체조건, 기술수준과 심리조건에 알맞게 고유한 특점을 구현하면서 장기간의 간고한 훈련과 경기실천을 거치는 과정에서 련마되고 서서히 추형을 이룬다.


(하다면 내가 버린것이 우리 길림성대의 풍격이였단 말인가?)

재래로 연변팀과 길림성축구팀을 비롯한 조선족축구팀들은 나라를 대표하여 그 어떤 강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접전하며 자기들이 구축해온 소박하고도 효과적인 기술동작들을 널리 구사해왔었다. 또한 그에 합당한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돌파해 꼴문을 찌르는것을 어른들의 축구라고 적극 숭상해왔고 먼거리련락으로 대방의 문전에서 혼전을 벌이는것을 정통축구의 정수로 치부했었다. 그런 와중에 터지는 꼴은 당연히 축구의 꽃으로 리해했고…

이는 당시 강호를 주름 잡던 조선족축구팀들의 비밀병기요,비법이기도 했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 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 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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